“퓨전사극 영화 출연이 예정돼 있습니다. 연기자라는 직업을 통해 양파 껍질 벗기듯 보여줄 것이 많고, 카메라 앞에 서면 항상 행복함을 느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연기자를 꿈꿨습니다.”
지난 7월 25일 서울 청담동 ‘액터스쿨’에서 고종황제의 증손녀이자 영화배우 데뷔를 앞둔 이홍(32)씨를 만났다. 그녀는 ‘비둘기집’을 부른 이석씨의 장녀로 8월 초 KTF 광고를 촬영하면서 연예계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이석씨는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의화군(의친왕) 이강의 열한 번째 아들로서 가수, 군인, 수도승 등으로 인생역정을 겪었고, 지금은 전주시 완산구 고사동에 있는 한옥마을인 승광재에서 생활하며 전주대, 전북대, 충청대 등에서 역사를 강의하고 있다.
“연기자가 되겠다고 하니까 집안 어른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호적에서 지우겠다고 하신 분도 있었죠. 하지만 미국 생활을 오래 하신 부모님의 지지 덕분에 꿈을 이룰 수 있게 됐습니다.”
이홍씨는 아버지 이석씨와 함께 지난 7월 5일 영화 ‘한반도’의 VIP 시사회에도 참석했다. “영화를 보면서 계속 울었습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도 억울했고 고종과 명성황후께서 돌아가시는 장면도 너무 슬펐습니다. 그렇지만 영화가 끝난 뒤 강우석 감독님께서 훌륭한 영화배우가 되라고 격려해 주셔서 큰 힘이 됐습니다.”
그녀의 본적은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번지. 이는 경복궁의 옛 주소. “몇 년 전 경복궁 앞을 지나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내가 왜 눈물을 흘릴까?’라고 생각하다가 그곳이 명성황후께서 시해 당한 곳이라는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이상한 것은 눈물이 먼저 나왔고 그 다음에 명성황후 시해 장소라는 걸 인식하게 된 거죠.”
그녀가 궁궐에 처음 가본 것은 유치원 때였다. 덕수궁에서 열린 전국 유치원 사생대회에 참가했다. “하늘을 온통 핑크색을 칠했는데 대상을 받았습니다. 주최 측에서 피카소처럼 훌륭한 화가가 되라고 하면서 상을 주시더군요.”
이씨는 자신이 황실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알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중학교 때부터는 국사를 제대로 배울 테니까 이제는 너도 알고 있어야 한다’면서 증조할아버지가 고종이시고, 아버지는 ‘사동궁 세자’로 불렸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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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아버지(이석)와 어머니(독고정희)는 이씨가 세 살 때 이혼했다. “아버지는 LA로 떠났고 어머니는 뉴욕으로 가셨습니다. 저는 외가에서 할머니 손에 자랐죠. 미국에 가신 어머니는 뉴욕에서 패션 공부를 하시다가 뉴욕 블루밍데일 백화점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3개월 만에 세일즈 여왕으로 뽑혀 1억원 정도의 상금을 받았다고 하시네요.”
이씨의 어머니는 1년에 한 번 정도 한국에 들어왔다. “어머니가 뉴욕에서 오는 날은 아침부터 예쁜 옷을 입고 좋아하면서 뛰었어요. 하지만 어머니가 다시 뉴욕으로 떠나는 날은 공항이 울음바다가 됐습니다. 외할머니께서는 ‘모녀의 이별’을 눈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씨가 중학교 3학년 때 영구 귀국했다. “어머니께서 대기업 패션 부문 이사로까지 활동하셔서 경제적인 어려움은 전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네 안에 있는 능력은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다’고 하시면서 제가 어릴 적부터 미술, 피아노, 수영, 승마, 리듬체조 등 10여가지 예·체능을 배우게 하셨어요.”
이씨의 어머니는 요리 솜씨가 좋아서 설날과 추석에는 ‘궁중 손만두’를 직접 만들었고, 지인의 요구로 판매까지 했다. “하루는 어머니가 만두 배달용 박스를 사러 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3개월간 입원 후 재활치료를 받아 다시 걷게 되셨죠. 어린 나에게 첫 번째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녀의 기억에 깊이 남아 있는 두 번째 사건은 할머니가 자전거에 치인 것이었다. “저희가 살던 아파트 건너편 공사 현장에서 매일 큰 소음을 냈어요. 그래서 주민이 항의를 했는데, 건설회사 측에서 주민 위로 차원으로 쌀을 나눠주겠다고 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새벽에 그 쌀을 받으러 나가셨다가 자전거에 치였습니다. 도로변에 쓰러져 있는 할머니를 어떤 남자가 부축해서 경비원 아저씨에게 넘겼고 저희에게 연락이 온 거죠.”
이씨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던 외할머니가 지난 1월 20일 사망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혈압이 높아져서 2개월간 입원했습니다. 할머니 시신은 할아버지 묘에 합장했고 어머니는 최근에서야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아버지 이석씨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은 거의 없다. “제가 가지고 있던 돌 사진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습니다. 큰어머니이자 영친왕의 부인이었던 이방자 여사께서 제 돌옷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저는 그 옷을 입고 엄마, 아빠, 이방자 여사와 함께 사진을 찍었죠. 그 뒤로는 아버지와 19세 때 다시 만났습니다. 당시 저는 고 3이었고 대입 6개월 전이라 반갑기도 했지만 상당히 혼란스러웠습니다.”
미술에 재능이 있었던 이씨는 한성대 산업디자인학과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미술은 네 살 때부터 배웠는데 정말 흥미로운 분야입니다. 정신병을 앓는 사람을 치료하는 데에도 쓰일 수 있죠. 저도 미술로써 비정상인을 치료하는 것을 연구해보고 싶습니다.”
그녀는 연기와 함께 평생 사회 봉사활동을 병행하고 싶어한다. 이씨는 서울 금호동에 있는 영광교회의 청소년캠프 운영이사이기도 하다. “평생직으로 매일 오전 출근을 합니다. 8월 초에는 강원도 수해복구를 도왔고, 8월 말에는 아프리카 탄자니아와 우간다로 봉사활동을 떠납니다. 평생 봉사활동을 하신 테레사 수녀를 가장 존경합니다. 궁극적으로는 1년을 반으로 나눠 연기와 유네스코 친선대사 활동을 병행하는 안젤리나 졸리와 같은 영화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이씨가 한때 접으려고 했던 연기자의 꿈을 다시 한 번 현실로 옮기게 된 것은 MBC 드라마 ‘궁’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시청자로서 재미있게 봤고 제가 의상 자문에도 일부 참여했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아버지가 하고 있는 황실보존 운동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황실보존 국민연합회 회장입니다. 전국에 회원이 8만여명이나 되죠. 드라마의 원작만화인 ‘궁’을 쓴 박소희 작가는 인터넷 카페 ‘대한황실 재건회’ 회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표현은 ‘꿈을 디자인하는 여자’이다. “결국 꿈꾸는 사람이 성공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늘 배우로서 성공한 제 모습을 영상으로 꿈꿔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시련이 와도 오뚝이처럼 일어나게 되죠. 제가 자신을 믿지 않으면 누가 저를 믿어주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