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출신 문소황후의 아들인 북위(北魏)의 세종 선무제(宣武帝:재위 500~515)는 즉위 직후 고구려에 있던 외삼촌들을 부른다. ‘위서(魏書)’ ‘고조(高肇) 열전’은 “세종은 아직 외숙(外叔)들을 만나지 못했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고구려의 외숙 고조와 고현(高顯)이 북위의 수도 낙양으로 달려와 화림도정(華林都亭)에서 황제인 조카와 감격적인 상봉을 한다. 세종은 문소황후의 부친 고양(高�)에게 내렸던 발해공(渤海公)이란 작호를 고조의 장조카 고맹(高猛)에게 세습시킨다. 세종은 고조에게 평원군공(平原君公), 고현에게 징성군공(澄城君公)이라는 작호를 하사한다. ‘위서’ 고조 열전은 “고조의 동생 고현은 시중(侍中)을 역임했는데, 고려국 대중정이었다”(肇弟顯侍中高麗國大中正)라고 적었다. 고구려 고위층이던 이들이 일정한 세력을 거느리고 남하했을 가능성을 말해 준다.
고조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영이부(領吏部), 기주대중정(冀州大中正)에 오른 후 세종의 고모인 고평공주(高平公主)에 의해 상서령(尙書令)에 추천된다. 세종은 효문제의 동생인 함양왕(咸陽王)이 역모에 걸려 죽자 재산을 모두 고조에게 주어 물적 토대를 삼게 한다. 고조에게 비판적인 ‘위서’는 “고조는…붕당을 결성해, 자신에게 붙는 자는 순서를 뛰어넘어 승진시키고, 배척하는 자는 대죄(大罪)에 빠뜨렸다”고 적었는데, 이는 고조가 북위 조정을 장악했다는 뜻이다.
서기 514년 세종은 서쪽 촉(蜀) 지역을 정벌하면서 고조를 대장군에 임명해 군권까지 주었다. 그러나 이듬해 세종이 급서하면서 전세는 역전된다. 태위(太尉)였던 고양왕(高陽王)이 영군(領軍) 우충(于忠) 등과 짜고 조문을 위해 전장에서 달려온 고조를 살해한 것이다. 그러나 고조의 아들 고식(高植)은 중서시랑과 제주(濟州)자사를 역임하고, 조카 고맹은 이모 장락공주(長樂公主)에 의해 부마도위가 되고 중서령(中書令)까지 역임한다. 해외 교포 700만, 해외 거주 한국인 국적자가 290만 명에 달하는 한민족의 세계화 시대에 고씨 일가는 일찍부터 해외에 진출해 성공한 선구적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