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離見の見(리켄노켄)’. 일본 전통극 ‘노(能)’에서 연기의 최고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마음의 눈’으로 객석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자세라고 한다. 남의 입장에서 남을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보다 진일보한 관법(觀法)이다. ‘리켄’의 자세로 이런 상상을 해 보는 것도 우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싶다.

일본 국회의 대정부 질문. 총리와 야당 국회의원이 제 나라 국정 운영방식을 두고 이런 말싸움을 벌였다.

“이러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국 사람 때밀이를 할 때가 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국회의원)

“정부가 잘못해서 한국 사람들 몸을 씻어주는…(웃음) 뭐라고 하셨지요?”(총리)

“‘때밀이’요.”(국회의원)

“때밀이를 해주는 시대가 온다는 표현은 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총리)

“저도 그럴 가능성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걱정이 돼서 하는 얘기이고요.”(국회의원)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총리)

수많은 일본인이 한국에서 때밀이 관광을 즐기고 돌아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제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다른 국민 생업을 들먹이는 국회의원이나 “그런 일(일본인이 한국인 때를 밀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발끈하는 총리를 보면서 우리는 분노와 자괴감을 피할 수 있을까.

물론 이 대화는 상상이다. 하지만 일본 총리를 한명숙 총리, 일본 야당 국회의원을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 ‘때밀이’와 ‘한국인’을 ‘발 마사지’와 ‘중국인’으로 바꾸면, 지난 8일 한국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나온 공식 의사록으로 변한다.

정 의원이 “(중국이 문화혁명을 하는 동안 한국이 개방을 한) 결과가 지금 중국에 발 마사지 받으러 가는 것”이라고 하자, 한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잘못해서 중국 사람 발 마사지를 해주는 시대가 온다는 표현은 과하다”고 받아쳤다. 아무리 반복해 들어도 ‘과한 것’은 중국 사람에게 과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과 정부에게 과하다는 뜻이었다.

이 말을 중국 국민이 들었다고 상상해 보자. ‘리켄’의 눈으로 보면 말 못할 수치를 느낄 중국인과, 먹고살게 됐다고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는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선명히 떠오르지 않을까.

이번엔 이런 가정을 해 보자. ‘때밀이 발언’ 사흘 뒤 일본 출입국관리소에 수용돼 있던 한국인 8명이 화재로 숨졌다.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의 공공시설에서 일본 말로 “문 열어줘”를 외쳤지만 아무도 구해주지 못했다. 화재경보기조차 울리지 않았다. 물론 무대를 바꾸면 이것은 가정이 아니라 현실이다.

일본엔 지금도 한국인 4만여명이 불법 체류하고 있다. 매년 8000여명이 수용소를 거쳐 한국으로 추방된다. 불법 체류자 1위(중국이 2위), 강제 추방자 2위(중국이 1위). 돈 벌러 일본에 들어오는 기능(技能) 인력 순위에 중국, 네팔, 인도에 이어 한국이 4위에 올라 있다. 여전히 많은 한국인이 일본에서 일본인 발을 주무르고 일본인 몸을 닦는다. 한국이 중국 노동자 취급하듯 일본이 이들을 취급했다면, 우리는 또 얼마나 슬퍼하고 분노했을 것인가.

우리는 남을 얕볼 처지가 아니다. 남을 얕보면 언제, 어디에서든 부메랑을 맞을 수 있는 입장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너무 모른다. 우리가 하는 얘기, 행동이 어떤 증오를 부르고, 어떤 결과를 만들지 무심하다. 객석에서 보면 오버 액션하는 삼류 배우일지 모른다는 성찰 따윈 안 한다. ‘리켄(離見)’에 투영되는 한국이 점점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