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노직(Robert Nozick·1938~2002)은 롤스(J. Rawls)와 더불어 20세기 후반 영미의 분석적 정치철학을 대표했던 인물로 2002년 64세에 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6권의 저서를 남겼다. ‘아나키,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Anarchy, State, and Utopia·1974)는 그의 처녀작이자 유일한 정치철학적 저술이다. ‘철학적 설명들’(1981), ‘검토된 삶: 철학적 명상’(1989), ‘불변성’(2001) 등 그 후 나온 저술들이 모두 순수철학에 속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그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 기여가 이 정치철학적 저술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로크와 칸트의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 및 하이에크와 로쓰바드(M. Rothbard) 같은 신우익 이론가들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는 이 책은 그보다 3년 앞서 복지국가를 옹호한 롤스의 ‘정의론’(1971)과 여러 측면에서 비견되는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가상적인 자연상태로부터 최소국가론을 도출·정당화하는 부분으로, 왜 무정부사회가 아닌 최소국가가 정당화되는지를 논증한다. 노직은 로크처럼 “개인들은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자연상태의 개인들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무력과 사기 및 도난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자발적인 동의에 입각하여 보호기관을 구성·선택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집단적인 상호보호의 필요성이 점증하는 상황에서 기업가적인 마인드가 있는 개인들은 보호업무를 전담·판매하는 회사들을 차리게 되며, ‘보이지 않은 손’의 작용에 의해 일정한 영역 내의 고객보호를 전담하는 “최소국가와 아주 닮은” 지배적인 보호기관이 출현한다. 이 지배적인 보호기관은 고객보호를 위해 시비의 판단권과 강제력을 독점하고 모든 비(非)가입자들을 그 보호아래 포섭하면서 마침내 최소국가를 형성한다.

2부에서는 최소국가 이상으로 확장된 ‘재분배국가’는 일부 개인들을 타인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개인의 존엄성과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최소국가 형태가 정당화될 수 있는 가장 최대치의 국가임을 논증한다. 노직에 의하면, “자유는 패턴을 교란시키고” “패턴은 자유를 파괴하기 때문에” 일정한 패턴에 따른 재분배와 개인적 자유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그의 ‘정의에 대한 권리이론’(entitlement theory of justice)은 “정당한 획득”과 “정당한 이전(移轉)” 그리고 “교정의 원칙”에 따른 부와 소득의 분배만이 정당성을 갖는다는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 이 원칙에 따르면 “근로자의 소득에 대한 과세는 일종의 강제노동으로서” “그 사람의 노동의 일부를 전유하는 것과 같으며”, 결과적으로 “그 사람의 일부에 대한 소유권을 공유하는 것과 같다.” 개인의 권리는 국가에 의한 이와 같은 권리침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측면제약” 기능을 수행한다.

마지막 3부는 자유로운 선택과 동의 원리에 입각하여 최소국가를 개인과 집단들이 자유롭게 가치관을 추구할 수 있는 정치질서로, 말하자면 “유토피아를 위한 유토피아”로 제시한다. 이곳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동의할 경우 심지어 사회주의적인 원리에 따라 살 수도 있고 이슬람이든 불교든 힌두교든 마음대로 믿을 수도 있다. 유일한 금지사항은 사람들을 특정한 가치관이나 방식에 따르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노직은 최소국가가 정치생활을 매우 빈약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inspiring)” 국가임을 강조하고 칸트적 수사를 원용하여 대미를 장식한다. “최소국가는 우리들을 불가침의 개인으로 대우한다. 즉, 우리는 최소국가 안에서 결코 타인의 도구나 수단 또는 자원으로 이용당하지 않는다.”

노직의 자유지상주의가 갖는 매력과 한계는 공히 권리에 대한 강력한 옹호에 있다. 권리의식이 팽배해 있는 현대사회에서 권리중심 자유지상주의는 강력한 호소력을 지니며, 무엇보다 공리주의적인 공공정책이 유린하기 쉬운 소수집단의 권리보호를 위한 강력한 논거를 제공해준다. 하지만 그의 권리 일방주의는 사회를 결속시키는 공동선(善)이나 유대와 같은 다른 가치들 및, ‘필요’나 ‘공과’(功過)와 같은 다른 분배원리들을 통해 균형 잡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