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들어서자 정치철학은 침체에 빠졌다. 서구 지성들은 규범문제보다 진리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 대륙의 현상학과 영·미의 분석철학은 모두 ‘사태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라는 진리인식의 문제에 매달렸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나자 서구 지성들은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세계대전은 반(反)문명적인 야만성을 참혹하게 드러냈다. 스스로 규범문제를 회피했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던 서구 지성들은 자책감에 시달렸다. 더욱이 1960년대에 일어난 미국의 시민권 운동이나 유럽의 68학생운동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제 어느 누구도 ‘사회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 것인가’라는 규범확립의 문제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존 롤스(John Rawls·1921~2002)가 1971년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을 발표하자 세계 지성계는 떠들썩해졌다. 여러 학문분야의 수많은 지성들이 롤스의 학문작업을 화두 삼아 풍성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정치철학의 르네상스가 도래했고, 정치철학은 가장 주목받는 학문분야가 됐다.
롤스의 주장은 뜻밖에 단순하다. 그는 사회정의원칙을 내세웠다. 그것은 ‘평등한 자유의 원칙’ 및 ‘기회균등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이 순차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차등의 원칙’과 ‘우선성의 원칙’이다.
차등의 원칙이란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이익이 되도록 재화를 분배하는 원칙이다. 최소 수혜자란 생산활동에 참여하는 최하위계층인 미숙련노동자를 일컫는다. 이 원칙은 재화분배의 불평등도를 통제한다. 불평등이 너무 커져서 최소 수혜자가 손해를 보기 시작하면 이 지점에서 재화분배의 불평등도가 고착된다. ‘최저임금제’와 같은 복지정책은 이 원칙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회정의 원칙에는 우선성이 적용된다.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 최우선이고 다음이 기회균등의 원칙, 마지막이 차등의 원칙이다. 상위의 원칙이 충족되지 않으면 다음 순위의 원칙을 적용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 충족되지 않으면 기회균등의 원칙을 적용할 수 없다. 우선성의 원칙은 자유를 절대시하는 자유주의의 기본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렇게 보면 사회정의원칙은 특별히 새롭지도 않다. 복지사회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모두 익숙한 정치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롤스의 학문작업에 그토록 매료됐을까? 그 까닭은 롤스의 주장내용에 있지 않고 그의 정당화 논리에 있었다.
롤스는 사회계약론의 전통을 되살려 절차이성에 호소한다. 그는 자유롭고 평등한 합의절차인 ‘원초상황’을 상정한다. 가상적인 원초상황에는 누구나 자신의 특수상황을 잊은 채 보편적인 사회정보만 가지고 참가한다. 이처럼 공정한 원초상황에서 사회정의원칙이 채택되리라고 믿고 있다.
롤스는 사회정의원칙이 정당하기 때문에 원초상황에서 채택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정의원칙이 공정한 원초상황에서 채택될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정당성의 근거가 사회정의원칙 자체에 있지 않고 원초상황이란 합의절차에 있다. 이것이 절차이성의 정당화 논리이다.
이와 달리 전통적인 사회이념들은 직관적으로 호소되고 있다. 예를 들어, 공리주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극대화 원리를 주장하고, 사회주의는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만큼 분배 받는다”라는 ‘고타강령’을 주장한다. 여기서는 극대화 원리나 고타강령 자체가 바람직하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주장된다. 정당성의 근거가 어떤 합의절차에 있지 않고 사회운영원칙 자체에 있다. 이것이 실질이성의 정당화 논리이다. 실질이성의 정당성을 직관적으로 호소하면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어렵다. 그런 사람을 설득하려면 강제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실질이성의 정당화 논리는 결국 권력논리로 귀착된다.
롤스의 ‘정의론’은 이런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보여줬다. 롤스에 따르면 아무리 바람직한 실질이성도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공정한 공론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정당화될 수 없다. 절차이성보다는 실질이성에 쉽사리 마음을 빼앗기는 우리네에게나, 다양한 문화양식이 뒤섞이고 있는 21세기의 지구촌 사회에서 롤스의 학문작업은 더더욱 빛을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