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대중경제론(大衆經濟論)’은 원래 좌파 경제학자 박현채(朴玄埰·1934~1995) 전 조선대 교수의 대필(代筆)로 탄생한 것이었으나, 1980년대 이후 박현채씨를 부정하고 ‘박정희(朴正熙) 노선’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변신’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김일영(金一榮)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는 최근 출간된 책 ‘박정희 시대와 한국현대사’(선인 刊)에 실린 논문 ‘조국근대화론 대(對) 대중경제론’을 통해 이와 같이 밝혔다. ‘대중경제론 대필’ 문제가 학술 논문을 통해 공론화되기는 처음이다.

故박현채 조선대 교수<br><a href=http://search.chosun.com/man/search_man.asp?keyword=박현채 target=new><img src=http://image.chosun.com/common/200410/sys/ico_relation.gif border="0">박현채 프로필 검색<

◆"석사논문 등 세 편 대신 써줘"

김일영 교수는 "대중경제론의 탄생과정은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고 말했다. 1966년 민중당이 '대중자본주의' 개념을 만들 당시 김대중씨가 참여한 것은 사실이고, 그 뒤 대선후보 유진오·윤보선씨가 '대중경제'를 공약으로 들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김대중씨의 이름으로 나온 ▲단행본 '김대중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1971) ▲경희대 경제학과 석사논문 '대중경제의 한국적 전개를 위한 연구'(1969) ▲'신동아' 기고문 '대중경제론을 주창한다'(1969)는 모두 박현채씨가 대신 써준 것이 분명하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1971년 대선 직전 출간된 '100문 100답'이 박현채씨의 작품이라는 것은 박씨의 가까운 후배였던 민족무예 경당 대표 임동규씨가 지난해 인터넷 매체 코리아포커스를 통해 증언했다. 임씨는 당시 박씨의 주도로 충남 온양의 여관에서 자신을 포함한 4명이 모여 보름 동안 합숙하며 이 책을 집필했다고 밝혔고, 석사논문도 박씨가 쓴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이에 대해 "분석 결과 '100문 100답'의 제1장 '대중경제의 이론'과 석사논문의 제4장 '한국적 대중경제론의 구상'이 거의 같은 내용이고, 논문 제3장의 내용도 '100문 100답'의 3~9장에 분산돼 있다"며 임씨의 증언이 사실로 보인다고 말했다. '신동아' 기고문 역시 대중경제를 '노동대중의 지혜와 능력을 발휘하고 복지를 보장하는 시스템'이라고 규정한 것 등에서 나머지 두 글과 겹친다는 분석이다. 기고문의 기본 방향은 1969년 신민당이 공식 정책으로서 발표한 대중경제론과 흡사한데, 여기서 한 문장이 한 단락을 이룰 정도로 아주 긴 박현채씨 특유의 문장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변신' 끝에 박정희식 모델 인정"

김대중씨는 1982년 도미(渡美) 이후 유종근씨 등의 도움을 받아 대중경제론을 다듬은 뒤 1986년 국내에서 '대중경제론'을 출간했다. 원래 자립적 국민경제 건설과 구조적 균형성을 지향하던 대중경제론은 1986년판에서는 수출과 자유무역, 자본의 자유로운 국제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1971년판과의 단절을 드러냈다. 나아가 "수출장려를 통한 경제개발 정책의 폐단을 강조하는 일부 급진적 경제학자들의 견해와는 다르다"고 말한 것은 실제 저자였던 박현채씨의 존재를 아예 부정한 것이라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김 교수는 "1986년 이후의 '대중경제론'은 1960년대 초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박정희 정부가 외부지향형 경제개발 전략과 정부주도형 개발방식을 선택한 것을 '현명한 정책'이었다고 보게 됐다"며 "이런 시각은 1997년 대선 직전에 다시 낸 '대중참여경제론'에도 그대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배신'이나 '투항'으로 볼 수 있는 이 변신은 박정희와 김대중 두 사람의 '화해' 과정이었으며, 학습을 통한 현실적응력이 김대중씨로 하여금 그렇게도 싫어했던 '박정희식 발전모델'을 인정하게 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