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광메이

문화혁명 당시 정치적 박해를 받고 비운의 죽음을 당한 류샤오치(劉少奇) 전 중국 국가주석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85)가 폐렴으로 13일 숨졌다고 중화권 언론이 보도했다. 유가족들은 이번 주 내에 바바오산(八寶山)혁명열사묘지에서 장례식을 치를 계획이다.

왕광메이의 인생은 남편 류샤오치처럼 파란만장했다. 그는 1921년 북양군벌 정권의 고위 관리인 아버지와 큰 기업인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48년 공산당 근거지였던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에서 공산당에 입당하고, 그곳에서 23세나 많은 류샤오치와 결혼했다. 두 사람을 이어준 것은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을 지낸 주더(朱德) 부부. 주더는 옌안 시절 부인과 이혼하고 혼자 있던 류사오치에게 국공협상 때 영어통역을 맡았던 왕광메이를 소개했다.

그는 중국 여성 중 최초로 원자물리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뛰어난 수학실력으로 '수학여왕'이란 별명을 가진 엘리트였다. 남편이 국가주석 시절 왕은 '중국 제1부인'으로 불렸다. 그러나 문화혁명이 발발하자 만인이 우러러보던 영부인에서 졸지에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몰려 온갖 박해를 받고 1967년부터 1979년까지 12년 동안 감금돼 있었다. 그 사이 남편이 허난(河南)성 카이펑(開封) 감옥에서 숨진 것도 몰랐다.

마오쩌둥(毛澤東)의 부인 장칭(江靑)은 자기보다 아름다운 외모에 학식이 깊은 왕광메이를 시기·질투해 혹독한 박해를 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광메이가 외국을 순방할 때 전통 복장인 치파오(旗袍)를 충고한 대로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개 비판하기도 했다. 왕광메이는 감금돼 있는 동안 류샤오치와 이혼할 것을 강요당하며 온갖 박해를 받았으나 끝까지 거부했다.

그는 장칭 등 문혁 4인방이 숙청된 뒤 명예회복돼, 전국정치협상회의(정협)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문화혁명 때 박해를 받을 당시 "다행인 것은 역사는 인민이 쓰는 것"이라는 남편의 말로 평생 위안을 삼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는 만년에는 산간벽지의 빈곤 부녀자를 돕는 '행복공정(幸福工程)' 조직위원회 주임을 맡아 봉사활동에 전력했다. 그는 친정 어머니가 물려준 골동품까지 경매로 처분하며 50만 위안(약 6000만원)의 행복공정 기금을 만드는 열성을 보였다.


(베이징=조중식특파원 jsch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