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다가오는 가운데 마종기 시인의 신작 시집을 펼치면 '가을, 아득한'이란 시를 만날 수 있다. '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이 가늠되지 않는/ 야 정말, 아득한 것만 살아남는 이 가을,/ 어렵게 살아온 천지간의 이 가을'이라고 시인은 노래했다. '아득함'은 시인이 삶과 타인에 대해 느끼는 심리적 거리감의 표현이다. 아득함은 시인의 고독에서 발원한다. 그래서 그는 아득한 저 너머에 있을 대상을 향해 호명한다.

'방안 가득 무거운 편견이 가라앉고/ 멀리 이끼 낀 기적 소리가 낯설게/ 밤과 밤 사이를 뚫다가 사라진다./ 가로등이 하나씩 꺼지는 게 보인다./ 부서진 마음도 보도에 굴러다닌다./ 이름까지 감추고 혼자가 되었다./ 우리는 아직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시 '이름 부르기' 부분)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 새벽 침상,/ 아무리 인연의 끈이 질기다 해도/ 어차피 서로를 다 채워줄 수는 없는 것/ 아는지, 빈 가슴 감춘 채 멀리 떠나며/ 수십 년의 밤을 불러 꿈꾸는 당신'( 시 '꿈꾸는 당신' 부분)

시인은 아득한 대상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시를 쓴다. 그는 온몸으로 우는 새처럼 시를 쓴다. "내 시가 내 안에서 시작되고 그래서 내가 책임 지고 울 수 있는 그런 시를 쓰고 싶다"고 시인은 평소 말해왔다. 그는 '시쓰기'라는 시를 통해 온몸으로 쓰는 시를 노래했다. '내 몸 하나 던지기./ 던진 몸들 발 앞에 쌓여/ 앞산이 한 발작쯤/ 물러설 때까지./ 아니면 뒷산이 목을 돌려/ 뒤돌아볼 때까지./ 아득한 맥박을 깨워/ 내 몸 하나 더...'

제 몸으로 쓰는 시이지만, 시인은 시에 대한 소유를 포기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시의 존재 그 자체다. '내가 물이냐고 물으면/ 내 시가 물이라고/ 대답해 주고 싶다./ 언어를 채우고 메우지만/ 온전한 자기 모습은/ 평생 녹여 감추고/ 사랑의 흔적만 남긴다'(시 '시인의 물' 부분)

따뜻한 서정과 맑은 지성의 언어를 빚어내는 의사 시인 마종기는 이번 시집에서 늙음과 죽음에 대한 성찰에 빠진다. 그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통해 존재의 무거움을 노래한다. 연작시 '잡담 길들이기'가 대표적이다.

'사람이 죽는 순간 21 그램의 몸무게가 줄어든단다. 무거운 어른도 마른 여자도 똑같이 동전 다섯개의 무게가 죽는 그 순간에 줄어들고, 영화에서는 그것을 사랑의 무게라고 했다. 살아 있을 때는 사랑할 수 있지만 죽으면 사랑은 딴 사람에게 가버린다. 그러며 그 21그램은 생명의 무게도 될까. 죽는 순간에 몸을 떠나는 생명. 몸을 떠나는 무게. 옆에서 누가 중얼거렸다. 그것은 영혼의 무게다. 몸이 죽으면 살아있던 영혼이 죽은 몸을 떠난다. (아니면 그냥 탈수 현상인가.)'(시 '잡담 길들이기 8'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