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개봉되는 영화 '괴물'(감독 봉준호, 제작 청어람)에서 변희봉의 활약이 눈부시다. 극중 그는 모자란 아들 박강두(송강호)를 감싸주는 아버지다. 고학력 백수인 박남일(박해일), 굼뜬 박남주(배두나)까지 2남 1녀를 둔 그는 배운 것도 없고, 큰 욕심도 없다. 오직 가족에 대한 애정이 세상의 전부인 그에게 손녀딸이 괴물에 끌려가는 사건이 발생하니, 접싯물에 바로 코를 박고 죽고 싶을 터.
송강호 배두나 박해일이 누군가. 충무로 최고의 연기파들. 그런데 '괴물'의 초중반은 확실히 그의 독무대다. 변희봉이 뱉어내는 대사들은 관객들을 쉴새없이 울리고 웃긴다. 도입부의 오징어 다리에 대한 현란한 애드리브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다. 강두에 대한 애절한 기억을 토해낼 때 관객들의 눈시울이 붉어지다가, 의외의 '유기농' 운운하는 '삑사리' 대사엔 쓰러지고 만다. 전형적인 소시민인 그가 강두의 코 묻은 동전을 뇌물로 내밀 때, 관객들은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터뜨린다. 완급 조절이 압권. 보통 내공이 아니면 불가능한 명연기다. 사실 변희봉의 인기는 다른 중견배우들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그는 이 시대의 전형적인 아버지 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망가지는, 파격적인 변신으로 시선을 끈 것도 아니다. 진지하면서도 코믹하고, 여기에 독특한 음성이 빚어내는 다양한 색깔이 요즘 세대에게 먹혀들어간 것.
그러나 그에게도 한때 후배들에게 밀려 은퇴를 결심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예 시골로 내려가려는데, 봉감독에게 연락이 왔어요. 일언지하에 거절했는데, 계속 전화가 오더라구요. 속는 셈치고 만나보니 봉감독이 과거 내가 출연했던 드라마를 줄줄이 꿰고 있더라구요. 그 열정에 넘어갔죠."
그렇게 시작된 봉감독과의 인연이 대박으로 이어졌다. 봉감독이 연출한 영화 '플란다스의 개'의 백미 중 백미, 보일러실의 엽기신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이후 충무로에서 제2의 전성기를 시작했다. '살인의 추억' '불어라 봄바람' '공공의 적 2' 등 다양한 캐릭터를 변주해내면서 사랑을 받았다.
역전의 노장이지만, 카메라 앞에서 그는 까마득하게 어린 후배들과 다를 바가 없다. "버걱될때는 가차없이 버린다. 그러나 이왕 시작하는 일은 최선을 다한다"는 삶의 원칙에 충실했다. '괴물'의 다리 밑 장면을 찍기 위해 18일 동안 살수차가 뿌려대는 물세례를 고스란히 맞았다. 지난 1월 8일 크랭크 업때까지 겨울 강바람과 싸웠다. 토끼털로 아랫배 부분을 채운 조끼를 의상안에 입고, 백금을 입힌 보철 치아를 착용해 '박희봉'의 고단한 세월의 흔적을 담아냈다.
벼는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고 힘 줘 말한 그는 '괴물'을 촬영하면서 딱 한번 봉감독과 의견이 갈렸던 적이 있다. 죽음을 앞둔 장면에서 "눈을 내리깔아달라"는 주문에 어리둥절해했던 것. 그러나 완성된 편집본을 보고 "내가 생각했던 대로 밀고 나갔으면 큰일 날 뻔 했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건강 비결은 삼시 세끼를 반드시 챙겨 먹는 것. "촬영이 길어지면 김밥 몇개라도 집어 먹는다"는 변희봉은 대사를 산에서 외운다. 서울 상도동 집 뒤에 있는 산을 돌아다니면서 맛깔스러운 대사를 빚어낸다.
60년대 극단 '산하' 출신. 후배들에게 연극 무대 나들이를 강추하는 그는 기회가 된다면 대학로에서 모노드라마를 해보고 싶단다.
감독-후배들에 대하여…
변희봉은 '괴물'을 촬영하면서 "호흡이 잘 맞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구나"란 생각을 수백번도 더 했다. 거의 교본에 가까운 환상 호흡을 보여줄 것이라 자신했다는 그가 봉준호 감독과 후배들에게 대해 평을 했다.
▲봉준호 감독 = 화난 얼굴 한번도 본 적이 없다. 항상 웃는 얼굴로 배우에게 접근하는 봉감독은 배우의 에너지를 뽑아내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 "마음에 드세요?"란 말로 배우의 피를 말린다.
▲송강호 = 더 이상 이야기가 필요없다. 정말 대배우다. 배우들은 다 저 잘난 맛에 사는데, 촬영장에서 다른 사람들 배려를 잘한다. 아무리 힘든 장면을 찍어도 불평이 없다. 내가 때리는 장면에서 주저하니까, 송강호가 오히려 나를 달래더라. 걱정 말고 때리라고.
▲배두나 ='플란다스의 개'때는 참 잘했지만, 그 사이 쑥쑥 컸다. 양궁하는 장면 하나를 찍기 위해 일주일 내내 태릉사격장에서 훈련을 받더라. 대강 시늉만 해도 될 것을. 프로근성이 대단하다.
▲박해일 ='살인의 추억'때 이미 보통 배우가 아니다란 생각이 들었다. 화염병을 던지는 장면을 하루 종일 찍었는데, 손에 화상을 입어도 군소리 한번을 안하더라.
(스포츠조선 전상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