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덩이 앞에서는 냇물을, 냇물 앞에서는 강물을, 강물 앞에서는 바다를 찾는 게 인간의 생리다. 바다 앞에서도 물이 모자란다고 느낄 수 있는 건 인간뿐이다.
무슨 뜻인지 정확히 고하라는 왕비에게 여축은 리진이 너무 향기로워 자신도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운명을 지녔다고 말했다. 얼핏 듣기엔 아름다운 말 같았다.
―너무 돋보여 일찍 죽지 않으면 멀리 귀향을 가게 될 것이옵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저 아이를 마마 곁에 가까이 두시면 전하의 마음도 저 아이에게 쏠릴 것이옵니다.
덧붙인 여축의 말은 왕비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리진을 왕비로부터 떼어내기 위한 여축의 간교라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인데도. 예전의 왕비였다면 여축의 속마음을 짚어냈겠느냐고 소아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만 떨기 꽃이 피어 궁궐을 비추니…. 연회에 나가 추게 될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창사를 웅얼거리고 있다가 소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한 리진을 쳐다봤다.
―왜?
―밤에 읽을 책을 구해놨어.
다른 얘기가 튀어나왔다.
―왕비마마께 읽어드린 것처럼 읽어줄 테야?
―원한다면!
하얀 이와 분홍빛 잇몸이 드러나도록 소아가 밝게 웃었다. 질문을 삼킨 리진도 웃었다. 소아의 웃음 앞에서는 누구라도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눈이 뺨으로 내려오는 소아의 눈웃음이 상쾌했다. 여축의 말이 있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왕비는 리진에게 지밀에서 수방으로 갈 것을 명했다. 지밀의 자리는 수시로 왕의 눈에 띄게 되어 있었다.
수방으로 옮기는 날 왕비는 리진을 물끄러미 보았다.
―임오년의 일을 기억하느냐?
임오년. 리진은 왕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왕비와 함께했던 그 비탄의 날들을 어찌 잊겠는지.
―너와는….
빛나는 눈으로 단호한 말씨를 쓰던 왕비가 말끝을 흐렸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둔 그런 인연을 맺고 싶지 않다.
왕비의 입에서 발설된 한 남자를 사이에 둔 인연, 이라는 말에 리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마!
―여기는 궁이다.
왕비는 칼처럼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리진도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여기는 궁이다. 리진은 말들을 숨기고 있는 왕비의 눈을 보고 싶었다. 여자와 남자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왕의 눈에 띄든 아니든 궁녀는 모두 왕의 여자들이다. 여기는 궁이다, 라는 한마디에 함축되어 있는 왕비의 말은 이 궁 안엔 왕의 마음만 있을 뿐이다, 그 말이었을까.
그렇다고 해도…. 리진의 눈가에 기어이 눈물이 고였다. 수방으로 옮겨가는 것이 서운해서가 아니었다. 수방으로 옮겨도 왕비가 부르면 언제든 찾아가 서책을 읽어드릴 것이고 왕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며 왕비가 불러주는 말을 궁체로 받아 적을 것이다. 왕비가 수심에 잠긴 날은 춤을 추기도 할 것이다. 지밀나인이며 무희였으나 연회가 없는 때의 리진은 주로 왕비 대신 각 전각에 보낼 서신을 쓰고 왕비가 연락을 취하고 싶어하는 대신들에게 서신을 전달하는 색장(色掌)이 하는 일을 맡아 했다. 수방으로 옮긴다 한들 크게 달리지지 않을 것이다. 그랬으나 큰나무에서 잎사귀가 떨어져 내리는 걸 보는 때와 같이 마음이 허전했다.
―아, 연회가 시작될 모양이야.
소아가 손에 들고 있던 목단을 들어 리진에게 흔들며 함께 협무를 출 무희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연회 준비를 마친 무희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 잠잠했던 전각 안은 다시 술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