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수만 있다면 임명된 다음날 죽어도 영광이다."

대법관을 곁에서 보좌했던 한 대법원 판사가 "판사라면 누구나 대법관에 오르길 갈망할 것"이라며 한 말이다. 그러나 대법관은 기록에 묻혀 6년간을 외롭게 지내야 하는 자리다. 다음달 5명의 신임 대법관 임명·제청을 앞둔 대법관 세계의 명암(明暗)을 들여다봤다.

◆'판사 중의 판사' 대법관="며칠간 잠이 오지 않았다." 한 대법관은 임명됐을 때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 30년 가까이 재판에 매달려온 직업 판사들이 대법관에 부여하는 의미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대법관은 판사 세계에서 선두를 달려온 사람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다. 사법연수원 한 기수당 2~3명 이상 나오기 힘들다. 대법관을 배출하지 못한 기수도 있다. 사법시험 합격점수와 연수원 성적으로 매겨져, 판사들이 '천형(天刑)'이라고도 부르는 '서열'이 결정적이다.

대법관 임명은 법적으로 법관 세계의 유일한 승진이다. 법원조직법상 법관은 '대법원장·대법관·판사'로만 구분되기 때문이다. 장관급 예우를 받는 대법관들에겐 최소 월 780여만원의 급여와 업무추진비, 재판수당 등이 추가 지급된다. 3000㏄급 승용차가 제공되고 별정직 4급(서기관급)의 전속비서관도 지원된다.

무엇보다 대법관이 갖는 영예(榮譽)는 '최종심' 법관으로서의 자부심이다. 근래 대법관에서 퇴임한 인사는 "하급심과 달리 판결 즉시 집행이 이뤄지는 위력을 지닌 것이 대법관의 판결이고, 종전 판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법관이 대법관"이라고 했다.

◆살인적인 업무량="이 고생하려고 판사들이 평생을 바친다니…." 한 검찰 출신 대법관이 대법관직을 시작한 지 일주일도 안 돼 한 말이다.

대법관의 업무량은 '살인적'이다. 작년 한 해 13명의 대법관이 처리한 사건은 1인당 1563건. 월 평균 130건 안팎이다. 고등법원,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연간 400여건의 사건을 처리한다. 미국 연방대법관 1인당 연간 업무량(87건)과 비교해도 엄청나다.

일요일인 4일, 4명의 대법관이 '출근'했다. 한 대법관은 "밀려드는 사건을 제때 처리하려면 토·일요일 중 하루는 반납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평일에 기록을 집으로 싸 가거나 직원들이 퇴근한 이후 조용히 다시 들어와 기록을 검토하는 대법관도 많다. 대법관 생활 6개월 만에 치아가 상했다는 한 전직 대법관은 "임명되는 날 하루만 기쁘고 나머지 6년은 고생이란 얘기가 빈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들을 보좌하는 재판연구관도 '죽을 맛'이다. 대법관 1명당 3명이 배치되는 연구관들은 근무기간(통상 2년) 내내 기록에 둘러싸여 있다. 연구관들은 매주 10여건의 중요사건 연구보고서를 대법관에게 올려야 한다. 연구관은 임기를 마치면 '수감생활'을 마쳤다는 의미로 '두부'를 선물받는 게 관행이다.

◆6년간 수도승의 삶?=대법관의 삶은 '수도승' 같다. 한 대법관은 "최종심인 대법관의 판결은 곧 사법적 진실이 되는 만큼 대법관의 고뇌는 말할 수 없이 깊고 무겁다"고 했다.

그래선지 대법관들이 모이는 자리는 적막하다. 식사를 하면서도 뭔가 깊이 생각하는 대법관들이 많아 대화가 거의 없다.

유일하게 큰 소리가 나는 경우는 '합의(合意)'할 때. 4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되는 '소부(小部)'에서 합의할 때는 사무실 밖으로 고성이 새나오기도 한다.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도 대법관이 되고 나면 마음 놓고 만날 수 없다. 한 대법관은 "사람 만나는 일 자체가 정말 조심스럽다"고 했다.

전임 최종영(崔鍾泳) 대법원장은 향우회 모임에서 누군가 사건 청탁을 하는 소리를 들은 뒤 임기 6년간 집무실에서 혼자서 식사를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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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은 대법원장을 포함해 13명이다.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조 경력 15년 이상, 40세 이상이어야 대법관이 될 수 있다. 장관급의 예우를 받는다. 임기는 6년, 정년은 65세. 정통 법관의 경우, 예비 판사로 출발해 지방법원 합의부 배석 판사→단독판사→고등법원 배석판사→지법 부장판사→고법 부장판사→법원장을 거친다. 판사로 임관한 후 대략 30년 정도가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