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텍스트(text) 없이 홀로 설 수 있을까. 이미지와 디지털 부호가 감수성을 지배하는 시대에 '21세기 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논란은 증폭 중이다. 소설가 정영문(사진 오른쪽)씨가 오는 5월 7일 '2006년 서울, 젊은 작가들'(한국문학번역원 주최) 행사에 참석하는 폴란드 소설가 올가 토카르축(왼쪽)씨와 '디지털 시대와 문학의 모습'을 주제로 이메일 대담을 나눴다.
▲정영문=사람들은 문학이 현실을 재현하거나 반영한다고 믿어왔지만 그건 과거지사다. 우리에게 양분을 공급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은 현실을 해체의 대상으로 본다. 고약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뿌리내리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디지털 문명, 사이버 세상에 들어왔다는 점이다.
▲올가 토카르축=기술의 발달 때문에 가능해진 다양한 서사 방식을 살펴볼 때, 문학의 미래 모습을 예측하기 어렵다. 지금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은 '문학이 대중적이고 일반화된 세계관을 한 걸음 앞서갈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그 '한 걸음'이 형식인지 내용인지, 혹은 언어이거나 이미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디지털 기술은 문학에도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지만, 문학의 진정성을 떨어뜨리고 저질화를 부추긴다. 이런 형태의 문학이 문학으로서의 근거가 있는지조차 의심하게 만든다. 나는 디지털 세계에 살고 있지만 저항하는 편이다.
▲토카르축=보르헤스는 유명한 '거울과 가면' 이야기에서 문학을 현실을 비추는 거울도, 그것을 숨기는 가면도 아닌 단검이라고 했다. 문학은 삶에 대한 깊은 침투와 투시, 통찰을 가능케 하는 단검이다. 형식이 어떠하든 그 미덕을 잃는다면 문학이 아니다. 내가 정의하는 문학은 '시간의 변화에 수반되는 언어' 또는 '시간을 이야기하는 도구'다. 순간을 노래하는 일본 단가(短歌) 하이쿠, 19세기에 유행하던 대하소설, 감상적인 에세이가 모두 문학이다. 컴퓨터 게임으로 변화한 신화와 전설처럼 기원이나 창조의 과정을 담은 장르와 사이버문학도 문학이 아닐 이유가 없다.
▲정=당신을 글쓰기로 이끄는 것은 무엇인가. 내게 글쓰기는 막연하지만 지독한 불안과 무한히 표류하며 희미하게 지워지려는 '나'라는 존재를 간신히 붙드는 노력이다. 다시 말해, 내 병리학적 증세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대응이다.
▲토카르축=당신도 에세이 '새로움'에서 언급했듯, 모두가 예외없이 지지하는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all) 대신 '각자'(each)라는 개념만 있을 뿐이며, 문학은 많은 도시로 쪼개진 연방국가다. 내 연방에서 글의 재료는 삶과 체험, 그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순간적이라는 데서 오는 불안이다. 그것은 영원 속으로 사라질 뻔한 무언가를 붙잡는 행위다.
▲정=때로는 가장 원초적인, 황홀한, 또는 경악하게 한 삶의 경험이 작품을 만든다. 나는 어린 시절 살던 시골 마을 뒷산에 불을 질러 '상당한 물의'를 빚었던 황홀한 기억이 있다. 소에게 어떤 짓을 했는데, 뒷발에 채여 하늘을 날아간 적도 있다. 그 후 내 삶은 순탄치 않고 경악스러운 것이 될 것을 깨달았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토카르축=나는 폴란드 남쪽 수데티라는 시골에 산다. 불교회관이 집에서 30㎞ 떨어진 곳에 있다. 얼마 전 본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영화 중 하나다. 이 모든 것들이 내게 소중하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이나 완전히 동떨어진 타인에 대해 쓸 수는 없으니까.
(번역=최성은·한국외대 폴란드어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