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里長空 片雲浮動 晩雨一過 後 秋陽可愛 長空"(만리장공에 한 조각 구름이 떠도는가 싶더니 늦은 비 한 차례 지난 후 따사로운 가을 햇살은 더욱 정겹도다.) 필자의 서재에는 장공 김재준(1901~1987)이 말년에 직접 써 준 한시 한 점이 표구되어 걸려있다. 이는 예사 시가 아니라, 1930년대 이후 한국기독교의 저명한 진보적 신학자들이 자신의 호를 넣어 서로 지어 나누어 간직했다는 뜻 깊은 시구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네 사람인데, 즉 장공(長空) 김재준, 편운(片雲) 채필근, 만우(晩雨) 송창근, 추양(秋陽) 한경직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유학한 해외파 한국 장로교 신학자 제 1세대로 당시로서는 세계 신학의 신조류를 접하고 한국기독교 신학계에 직접 소개한 당사자들이다. 그 중에서도 김재준은 보수적 분위기의 한국 신학계에서 계속해서 경계와 수난을 당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김재준은 함북 영흥 출신으로 기독교에 입교한 후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대학 신학부를 거쳐 1928년 도미, 프린스턴신학교와 웨스턴신학교에서 구약학을 전공하였다. 귀국 후 한국에 성서비평학과 신정통주의라는 새로운 신학 사조와 방법론을 소개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신학계는 보수 정통주의가 주류인 바, 김재준을 비롯한 이들 신진 진보그룹은 강력한 배척을 받았다. 그 대표적 사건이 1934년의 이른바 '아빙돈단권주석사건'이었다. 이는 감리교 유형기가 편집책임을 맡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진보적인 성서주석서로 장로교에서도 김재준, 송창근, 한경직 등이 번역에 참여했는데, 장로교 총회는 이 주석서를 강독금지 시키는 동시에 여기에 참가한 장로교 신학자들에게 제재를 가했다.
김재준, 송창근 등은 일제 말기 서울에 '조선신학교'(현 한신대)를 설립하여 한국의 진보적 신학운동의 그루터기를 마련하였다. 해방 후 신학적 입장 차로 인한 갈등에서 보수 측의 박형룡 등과 격렬히 대립하였고, 마침내 1953년에 김재준이 '예수교장로회'에서 제명되면서, '기독교장로회'를 창설, 한국장로교회의 또 다른 정통성의 한 축을 계승하였다. 그런데 이 '기장'의 신학적 특징은 시대적 과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른바 '예언자적 신학'을 결행하는 일이었고, 그 선두에는 늘 김재준이 있었다. 1965년 동지 한경직 등과 함께 한 '한일국교정상화반대투쟁'으로부터 사회참여의 신학 실천운동을 시작하였고, 1969년에는 '삼선개헌반대범국민운동본부'의 위원장을 맡으면서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의 중추역할을 담당하였다. 정치적 억압 속에 오랫동안 캐나다 망명생활을 하였고, 말년에 귀국하여 활동하다가 1987년 1월 별세하였다. 바로 그의 제자 그룹에서 '민중신학'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기독교의 참여적 진보신학 계보가 형성되어 이른바 '예언자적 신학 운동'의 중심을 이루었다.
(연세대 교수·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