큼지막한 구멍이 눈을 잡아당겼다. 뮤지컬 '반지의 제왕'이 세계 초연 무대를 연 23일 밤(한국시각 24일 오전) 캐나다 토론토의 프린세스 웨일즈 극장. 지름 7m의 거대한 반지가 무대막 자리에서 객석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안쪽은 캄캄했다. 반지에서 뻗어나온 나무 뿌리며 가지들이 극장 천장과 벽까지 뒤덮은 걸 본 관객들이 탄성을 토해냈다. 포충망을 흔들며 반딧불을 잡는 호빗들의 익살은 잠깐. 드디어 반지가 들어올려지고 어둠 속으로의 아찔한 팬터지가 시작됐다.

뮤지컬 '반지의 제왕'은 "서사적인 밤(epic evening)"에 대한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200페이지가 넘는 톨킨의 소설 3권을 3시간30분짜리 공간으로 압축한 이 뮤지컬은 원작의 웅장한 이야기를 담으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골룸을 앞세우고 불의 산으로 가는 프로도와 샘의 여정, 그리고 악의 제왕 사우론이 보낸 괴물들과 맞서는 아라곤 일행의 혈투는 겹쳐졌다 떨어지길 되풀이하며 묵직한 드라마를 짜올렸다.

한 편의 서커스 보는 듯

무대 기술과 스펙터클은 '라이온 킹'이 낡아 보일 정도였다. 17조각으로 쪼개지는 입체적인 3중 회전무대가 조명, 바람, 포그, 음악, 영상과 어우러지며 다채로운 풍경을 밀어 올렸다. 출렁이는 무대는 빛과 어둠, 기쁨과 슬픔, 드라마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몸에 담으며 객석을 흔들었다.

거센 바람과 파편으로 관객의 볼을 때리는 1막 끄트머리, 사다리 타고 올라가자 열리는 요정의 세계, 춤과 서커스로 표현한 헬름 협곡의 전투, 무대 절반을 채울 만큼 크고 섬세한 거미 셀롭 등이 큰 박수를 받았다.

인도 작곡가이자 뮤지컬 '봄베이 드림스'로 이름난 A.R. 라만과 핀란드 팝그룹 바르티나가 합작한 음악은 퓨전 스타일이었다. 40여 곡의 노래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주제를 강조했고 전투로 굴러가는 이야기에 서정성을 보탰다. 프로도와 샘이 고향을 그리며 부르는 '나우 앤 포 올웨이즈(Now and for always)'가 오래 귓바퀴에 맴돌았다. 김리의 만가(輓歌)를 포함해 이 뮤지컬은 배우의 목소리를 악기의 한 편성으로 썼다. 액션 장면마저 작은 교향곡 같았다.

전투장면 '영화의 그래픽' 넘어서다

무대를 화학적으로 꿰뚫는 배우들은 영화의 CG(컴퓨터 그래픽) 없이도 환상을 헝클지 않았다. 키 작은 배우들이 호빗을 맡았고, 6m 장대에 올라탄 배우들이 엔트를 연기했으며, 거대한 전투 장면엔 춤과 서커스가 번졌다. 골룸 역의 마이클 데리올트는 흐느적거리는 몸과 불협화음 같은 노래로 두 내면을 보여주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프로도가 반지를 파괴하고 샤이어로 돌아온 후에도 사루만과의 싸움이 벌어지는 마지막 대목은 영화와 달랐다. 영웅 프로도가 다시 짐을 챙길 때 객석등이 켜졌다. 화들짝 팬터지에서 깨어난 관객들은 5분 넘게 기립박수를 몰아쳤다.

230억원 투입…한국제작사도 투자

4년이라는 시간, 사전 제작비로 역대 최다인 2700만 캐나다달러(약 230억원)를 들인 뮤지컬 '반지의 제왕'의 역사적인 초연 무대는 이렇게 닫혔다.

내년 봄엔 영국 웨스트엔드로 건너간다. 또 이미 독일·일본과 협상을 시작했다. '명성황후'의 에이콤이 CJ엔터테인먼트와 함께 200만 캐나다달러를 투자하는 등 이 작품의 성공엔 한국의 몫도 있다.

현지 언론들은 "지난 1월 9일 미국 브로드웨이 머제스틱 극장에 7486번째 공연을 올리며 브로드웨이 최다 공연 신기록을 세운 '오페라의 유령'에 견줄 대작의 탄생"이라고 평했다. '반지의 제왕'의 긴 여행은 이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