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이 끊겼거나 성장이 멈춘 듯한 영하 40도의 러시아 북쪽 땅끝 반도 야말-네네츠 자치구. 19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2300여㎞를 북쪽으로 날아가 다시 헬기를 타고 1시간 이상 정찰한 끝에, 순록을 따라 행군하는 100여 명의 한 무리를 만났다. 북극의 툰드라(나무가 없거나 키 작은 관목만이 자라는 땅)를 지배하는 부족, 네네츠 원주민들이었다.
이들이 이끌던 1만여 마리 남짓한 순록 무리가 잠시 멈췄나 싶더니, 장정 몇몇이 순식간에 '거주지'를 만들었다. 긴 막대기를 기둥 삼아 순록 가죽으로 원추형 둘레를 뒤덮은 '춤'이라 불리는 천막 10개를 세우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5분.
이어 여자들이 포대기에 담겨 있던 뭔가를 급히 꺼냈다. 한두 살배기 아이들이었다. 여자들은 아이들을 춤으로 데려간 뒤, 난로에 불을 붙여 실내 온도를 높였다. 차를 끓이고 수프를 준비했다. 이들은 여기서 기껏해야 하루를 보낸 뒤, 다시 북쪽으로 행군을 계속한다.
150㎝ 키의 네네츠 남자들은 전사(戰士)와 같았다. 얼마 후 무리와 먼저 떨어졌던 남자들이 약 250㎞ 떨어진 오비강 발원지의 얼음을 깨고 낚은 물고기를 들고 춤으로 찾아왔다. '묵순'이라 불리는 40㎝~1m의 이 '신비의 백색' 물고기는 북극해 인근에서만 잡힌다고 한다. 네네츠 여성 빅토리야 파나예프스카야(25)는 "육질이 세상에서 가장 쫄깃쫄깃하다"고 말했다.
이날 이들이 춤을 설치한 곳은 야말-네네츠 자치구의 중심 도시인 나딤시 부근. 하지만 행군을 멈춘 9시간이 오히려 더 바빠 보였다. "하루종일 280㎞를 이동했다"는 티모셰이(20)는 곧바로 먹을 것과 생필품을 사러 썰매로 나담시로 향했다. 네네츠인들은 묵순을 1㎏당 100루블에 도시민들에게 팔았다. 가족당 평균 200㎏의 묵순을 판 목돈 2만 루블(약 70만원)로 휘발유와 선글라스 등을 장만했다.
이날은 자치구 내의 네네츠 부족들이 모두 모여 레슬링과 순록잡기, 순록 썰매 경주를 하며 부족 간 시합을 하는 축제일이기도 했다. 도시민들은 이들을 신기한 동물이라도 보는 양, 연방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나 네네츠인 뱌체슬라프 아나구비치(47)는 도리어 순록 썰매를 타려고 수십m 줄지어 선 도시민들을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자치구 내 네네츠 유목민은 모두 4만5000명. 이들은 러시아 전역에 분포된 순록의 30%인 70만 마리와 함께 생활한다. 야말-네네츠는 세상에서 가장 청정한 구역이었다. 그러나 이곳도 1970년대 초 막대한 석유·가스전이 발견되면서 개발의 세찬 도전을 받고 있다. 러시아 석유매장량의 90% 이상, 가스 생산량의 90% 이상이 이곳에 몰려 있다.
'문명'은 어느덧 그들의 생활상도 바꿨다. 순록이 끌던 썰매는 스노 모빌로 바뀌고 있고, 유목민 중 도시에 정착하는 숫자도 갈수록 늘어 부족마다 위기감도 돈다. 에너지 개발은 이들의 순록 이동로를 잠식했다.
이날 밤 춤 속에서 자작나무로 불을 지피던 네네츠인들은 "우리에겐 순록과 춤이 전부"라며 "우린 석유, 가스가 필요 없다"고 말했다. 하롤랴 드미트리(47) 네네츠인 민족 대표는 "석유와 가스가 고갈되면 '문명'을 앞세워 이곳을 왔던 도시민들도 다시 떠나겠지만, 우리는 툰드라의 영원한 주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거센 문명의 물결로 깊게 팬 그의 얼굴 주름엔 고단함도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야말-네네츠=정병선특파원 bschung@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