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봉이, 대출이, 필두…. 반 친구들에게 놀림 받았을 법한 특이한 이름의 인물들이 일제히 영화 주인공 자리를 꿰차고 나섰다. 현재 상영중인 '흡혈형사 나도열'을 비롯해 올봄 개봉 예정인 '맨발의 기봉이' '마이 캡틴 김대출' '공필두'는 모두 주인공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 실존인물 이름을 차용한 '신성일의 행방불명' '키에누 꼬시기'까지, 2006년 충무로는 바야흐로 '이름 영화' 전성시대다.



◆주인공 이름도 하나의 브랜드

얼마전까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실미도' 처럼 제목만 봐도 스토리를 알 수 있어야 좋은 제목이었다. 그러나 성능보다 브랜드를 보고 물건을 고르는 요즘 관객은 캐릭터 이름을 직접 들이댈 때 더 큰 호기심을 느낀다. 인터넷 최다검색어로 올라온 낯선 이름에 마우스를 갖다 대는 것과 같은 이치. 문화평론가 김동식씨는 "튀는 아이디와 닉네임으로 승부하는 요즘 네티즌들에겐 이름이 곧 정체성"이라고 설명했다.

정재영이 도굴꾼 역을 맡은 '마이 캡틴 김대출(감독 송창수)'은 가제(假題)가 '소풍 가는 날'이었다. "제목이 임팩트가 약하니까 들어도 기억을 잘 못 하고 '독립영화냐'는 반응도 나오더라고요. 주인공 이름을 내세웠더니 인지도가 확 높아졌어요.(양중경 진인사필름 대표)"

'흡혈형사 나도열'도 접착력 강한 이름이 관객의 뇌리에 남은 사례. '나도 열 받으면…'의 약어가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이문식 주연의 '공필두'는 공정식 감독이 평소 듣던 "공정식을 필두로 해서…"라는 말에서 착안한 제목. 원래 '형사 공필두'였는데 최근엔 '형사'자마저 떼어 버렸다. "어차피 공필두라는 '인간'에 대한 얘기거든요. 처음엔 다들 "공 뭐?" 하면서 설명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한 번 들으면 절대 안 잊어버리던데요."

◆이름은 튀게 캐릭터는 만만하게

같은 '이름 영화'라도 '와니와 준하' '바이 준' 같은 부드럽고 낭만적인 이름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삼순이' 열풍 이후 대(對)관객 발언권이 '비주류' 캐릭터들에게 옮겨 갔기 때문. 10년 전, 5년 전 모든 사람들이 '와니'나 '준하'의 친구가 되고 싶어했다면, 이제는 '금자씨'가 궁금하고 '광식이'가 그리운 시대.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도회적이고 세련된 이름의 요즘 젊은이들은 순정만화풍 이름에 환상을 품지 않는다"며 "정감 가는 튀는 이름이야말로 관객과 캐릭터 간의 심리적 거리를 좁혀 주는 장치"라고 말했다. 특히 '기봉이' '김대출'처럼 개성 강한 이름은 '엽기성(코미디적 요소)'과 '인간미(휴먼드라마적 요소)'에 대한 기대감을 동시에 던져 주는 이점이 있다. 만화 세대가 영화 생산·소비의 주체가 된 것도 만화적인 제목과 캐릭터가 득세하는 이유. 짧고 자극적일수록 히트수가 높은 인터넷상의 '제목 장사' 법칙이 스크린으로 연장된 측면도 있다.



◆조연 같은 주연, 비주류를 대변한다

주목할 것은 '튀는 이름'의 주인공인 김수로, 정재영, 이문식, 신현준 등이 모두 주연보다 조연으로 더 친숙한 배우들이라는 점.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해당 영화들은 '이름 장르'라 해도 될 만큼 캐릭터의 개성을 부각시킨 작품인 만큼, 고정된 이미지가 없을수록 캐릭터와 포개지기에 유리하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스타로서의 위엄이 구축된 최민식은 '기봉이'라 불러도 최민식으로 보이기 쉽다는 것.

정승혜 영화사 아침 대표는 "요즘 관객들은 '신데렐라'식 대리만족이 아니라 인간적인 공감을 얻기 위해서 영화를 보기 때문에, 나보다 잘난 캐릭터보다 만만하고 친근한 캐릭터에 호감을 갖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