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이나 왕세자의 장인을 '국구(國舅)'라고 하는데, 동반(東班) 정1품에 제수되는 척리(戚里)이다. 왕의 외척(外戚)을 척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한(漢)나라 때 장안(長安·서안)의 척리라는 마을에 임금의 인척(姻戚)들이 살았던 데서 기인한다.
조선의 척리는 품계는 높아도 정사(政事)에는 참여할 수 없었는데, 이런 원칙을 만든 임금이 태종이었다. 태종이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의 친동기 넷을 사형시킨 사건은 유명하다. 민무구·무질은 어린 세자(양녕대군)를 끼고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협유집권(挾幼執權)' 혐의로 처형했고, 무휼과 무회도 그 연장선상에서 제거한 것이다.
태종은 상왕 시절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도 제거했다. 영의정 심온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전별하는 거마(車馬)가 장안을 뒤덮었다는 보고를 듣고 자신의 사후 세종의 왕권 강화를 위해 제거한 것이다. 심온의 동생인 총제(總制) 심정이 상왕 경호 문제를 언급한 것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심온까지 연루시킨 것이다. 이 비정한 외척 제거에 대해 이익(李瀷)이 '성호사설'인사문에서 "민(閔)씨·심(沈)씨 두 집안이 함께 흉화(凶禍)를 당하게 되었으니, 대개 먼 장래를 생각함이 매우 깊었던 것이다"라고 긍정했듯이 역사의 평가는 냉혹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한문제(漢文帝)가 처남 두광국(竇廣國)을 쓰지 않고, 외숙인 장군(將軍) 박소(薄昭)를 죽인 것을 들어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 외척의 정사 금지는 꼭 임금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태종 때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金漢老)의 처남(妻男)이었던 대호군(大護軍) 전맹겸(全孟謙)이 저자 사람의 생선을 빼앗자 경제 문제를 담당하는 경시서(京市署)는 즉각 고발했고 사헌부도 그를 논박했다. 태종이 양녕대군의 부인 숙빈(淑嬪)을 생각해 용서했으나 두 기관은 재차 고발했고, 태종은 할 수 없이 태(笞) 40대를 때렸다. 대통령 사돈의 음주운전 사고를 뒤덮기에 급급했다는 비난을 받는 현재의 경찰과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본받아야 할 엄격한 근무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