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 시대 이전

남성 나체상은 이 시대 성 유물의 '전속 모델'이다. 포인트는 실제보다 크게 묘사된 성기다. 서기전 4~3세기 '농사 짓는 풍경이 묘사된 청동기'. 따비로 밭을 가는 남자가 성기를 자랑스레 드러냈다.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홀딱 벗은 남자가 밭을 가는 풍속은 2000년이 지나도록 계속됐다. 16세기 문인 유희춘의 글을 모은 '미암집(眉巖集)'에도 매년 입춘 아침, 나체의 남성이 농사를 짓는 풍속을 적었다. 나경(裸耕)이다.



◆삼국 및 통일신라

서기 5~6세기로 추정되는 경주의 소형 무덤들에서 나온 토우 수십점. 신라인들이 성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대했는가를 알려준다.

국보 195호 목 긴 항아리를 장식한 후배위 자세의 토우. '다리만한' 성기가 삽입되기를 기다리는 여성의 표정에서는 희열과 설렘이 가득하다. 자위하는 모습, 섹스에 열중하는 남녀…. 신라 토우에는 미술사학자 고유섭의 말처럼 '무기교의 기교'가 한껏 담겼다.

돌이나 나무로 성기도 만들었다. 현재까지 6점 정도 알려져 있다.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소나무 남근은 자위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귀두 양쪽에 달린 '혹'이 흥미롭다. 성감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을까. '손'을 많이 탄 듯 반질반질하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일부에서는 경주 안압지 남근의 혹을 근거로, 통일신라시대 때 이미 일종의 '성기 확대 수술'이 행해지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의학사적 증거는 없다. 서기전 2세기 중국 한(漢)나라 제후 유승의 묘에서도 청동제 혹 달린 남자 성기가 출토됐다. 따뜻한 물에 담갔다가 사용했을 것이라는 게 중국학자들의 분석이다.

경주 구황동에서는 전체적인 비례미는 물론, 귀두의 곡선 부분이나 미세한 피부 주름, 요도구(口) 등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통일신라시대 초기 남자 성기가 출토됐다. 통일 직후 상승기에 있던 신라인들도 고대 그리스만큼이나 인체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던 것일까?

호사가들은 1970년대 말 황룡사 터에서 출토된 남근을 두고 입방아를 찧는다. 절에서 왜 남근이 나왔을까?

◆고려

'만전춘' '이상곡' '쌍화점' 등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 퇴폐적이라고 비판 받았던 고려가요. 송나라 서긍이 고려에 사신으로 와서 남긴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남녀가 거리낌 없이 옷을 벗고 시내에서 목욕을 한다"는 기록. 몽골 침입 이후 궁중의 난잡한 성생활…. 그러나 유물로 전하는 것은 구리거울뿐이다. 개성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구리거울. 후배위 등 네 가지 섹스 체위가 묘사됐다. 지름 9.1㎝, 두께 0.6㎝ 휴대용이다. 요즘으로 치면 '성 교육용 비디오'라는 평도 있다.

◆조선



성리학적 엄숙주의만이 이 시대를 억눌렀을까? 동전처럼 만들었지만 실제 화폐로 통용된 것은 아닌 별전(別錢). 고려시대 구리거울처럼 네 가지 체위의 성교 장면을 담은 것들이 숱하다. 이 시대 성 유물의 정점은 춘화(春畵)다. 18세기 초반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 온 신유한이나 19세기 실학자 이규경 등의 글을 보면 명(明) 후기 이후나 18~19세기 일본의 춘화가 국내에도 유입됐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춘화는 19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낙관이 찍힌 것도 있다. 이들의 작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동성애를 즐기는 여성을 두고 남성이 후배위로 섹스하는 장면, 70대 노인의 사랑을 담아 화제가 됐던 영화 '죽어도 좋아'처럼 노인끼리의 섹스 장면 등이 담겼다. 유행가 가사와는 달리 '사랑은 아무나, 누구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