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겨운 우리 소재와 화가의 고유한 체취를 소중하게 여기는 작품들로 구성된 전시회가 최첨단 과학기술의 현장인 ‘대덕연구개발구’에 위치한 화랑 ‘비비 스페이스(BIBI SPACE)’에서 열리고 있다. ‘하산하라!’라는 제목의 이 전시(26일까지·042-862-7954)에는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인 김미진, 김지혜, 김홍주, 문범, 박윤영, 서은애, 유승호, 이수경, 이종상, 정주영, 홍인숙 등 11명이 참여하고 있다.
원로·중견·신인으로 참여작가 연령대가 다양하고, 평면과 입체 그리고 구상과 추상 등 서로 다른 예술적 장르가 섞였다. 전시를 하나로 묶는 공감대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소하고 일상적인 소재 선택, 그리기라는 평범한 제작 방법, 시작과 끝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는 작가의 태도, 작품의 기술적 완성도 등 미술에서의 기본 문법을 비중 있게 다루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 동양화의 대표적인 작가 일랑 이종상의 장판화(장판에 그린 그림) 작품은 화면전체가 초자연적인 상징적 개념을 연상시키는 황금색의 분위기로 되어 있다. 그 위에 기하학적인 선으로 크게 면을 구분하여 서구 모노크롬 회화를 한국적으로 재해석했다. 국제적인 작가 문범의 마포 위 오일스틱 작업은 현대적이고, 귀족적이며, 기술적으로 완벽해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절제와 직감을 중요하게 여기던 과거 대가의 전통 산수화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도 느껴진다.
관객의 시선을 한눈에 끄는 작품으로는 김홍주의 화려한 키치(Kitsch)적 이미지가 있다. 화려한 형광색 뒤에 본질을 숨기고 있는 듯한 거대한 꽃잎 이미지는 마치 과자로 만든 마법의 성과 같은 판타지의 세계를 보는 듯하다. 이러한 판타지 뒤에는 수공(手工)을 고집하고 있는 작가의 철학이 존재하기에 김홍주의 꽃잎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이다.
이번 전시는 어떤 면에서 새로움만을 추구하는 경향들을 경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것을 되돌아보게 해 주고, 근원적인 진지함과 깊이에 관해 성찰해 보는 기회가 된다.
(이지호·대전시립미술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