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잘하는 거, 반만 영화로 만들지?" 박찬욱 감독이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를 발표하기 전까지, 그리고 이준익 감독이 2003년 '황산벌'을 발표하기 전까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준익 감독의 별명은 '토킹 머신'. 거기엔 '존경'보다는 '조롱'이 조금 더 많이 담겨 있다. 감독은 말이 아니라, 영화로 증명해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가 "호랑이는 가죽 땜시 뒤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뒤진다"는 기막힌 말을 담은 퓨전 사극 '황산벌'(2003)을 내놨을 때, 지인들은 놀랐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29일 개봉한 '왕의 남자'가 '태풍' '킹콩' '청연' 등 거대경쟁작을 누르고 흥행돌풍을 일으키자 이번엔 충무로가 경악했다. 게다가 관객반응은 순도 99%일 만큼 열광적이다. 이 감독,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저예산(제작비 45억원) 사극 영화가 성공할 것이라 예측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경제적 효율성이 있는 영화라고 해달라. 겉으로 봐서 이 영화는 약점투성이다. 스타 약하고, 제작비 적고, 사극이고. 나는 여기서 좁쌀만한 희망을 봤다. 지난 4900여년간 주류였으나, 최근 50년 혹은 100년 사이 '비주류'가 된 우리 것에 대한 사랑을 젊은 관객들이 먼저 확인한 거라면 좋겠다."
―'황산벌'도 그랬지만, 영화가 전복적이고, 발칙하다. 아예 광대가 '왕'에게 '맞짱'을 뜬다.
"공길이 양반의 방에 불려갈 때, 장생이 말한다. "밥만 나오면 다 팔어?" 장생은 시스템에 한(恨)이 맺힌 존재다. 자신의 천한 출생의 근거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하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인 거다. 연산은 '업(業)'이 많은 존재다. '선왕'이 만든 치적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 게다가 어머니를 죽인 사람들에 의해 보필을 받는 존재다. 한을 가진 광대와 업을 가진 왕이 인간으로 부딪치는 건 당연하다."
―영화의 감동은 결국, 비극적 이야기(영화는 비극으로 끝난다)가 주는 카타르시스인가?
"80년대 운동권이 이제는 시스템 운영자가 됐다. 진보적이고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그들 역시 이제 기득권이다. 이 시대 젊은층이 보기엔 그 386이 만든 시스템마저도 반발할 것 투성이일 것이다. 인간은 시스템으로부터 튀어나가려는 속성이 있다. 장생은 본능적 자유의지의 표현체이다. 관객은 시스템에 항거하는 인간에게서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연산군과 두 광대 사이의 긴장이 동성애적 3각 관계처럼 보인다. 특히 남성 동성애를 혐오하는 우리 관객들 사이에서 이에 대한 비난이 나오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
"노인이 어린 소년과 침소를 같이하는 행위, 그게 호모섹슈얼인가. 그건 '기'를 흡수하려는 '음양론'에 입각한 행위다. 동성을 탐닉하는 서양의 동성애와는 다르다. 셋은 연민으로 물고 물리는 관계다."
―'진짜 감독'이 되기까지 참 먼 길을 돌아왔다.
"대학교 2학년, 스물한 살에 더럭 애 아빠가 됐다. 스물넷에는 두 아이의 아빠가 돼 있더라. 7평짜리 아파트 월세 살며 직장을 구하러 다녔다. 과천 정부종합청사를 찾아가 수위에게 "취직 좀 시켜달라. 경비나 청소부도 좋다" 했더니, "에이 이 사람아, 그 일도 아무나 하는 게 아냐" 하더라. 어찌하여 광화문 종합청사에 24시간 교대근무 경비직하면서 한 컷짜리 시사만평을 그렸다. 85년 그걸 들고 조선일보를 찾아가, '야로씨' 오룡 선생을 만났다. '아이디어는 번쩍이는데, 이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네' 하시더라. 몇 군데서 더 거절당했다. 순수미술을 한 사람이 극장 간판을 그리는 건, 자기 혐오의 극치다. 간판 그리겠다고 찾아가 "아무나 하는 게 아냐, 이 사람아"란 말을 또 들었다. 그 말은 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에서 거부당하는 말이었다."
―영화사 씨네월드를 차린 계기는?
"영화 광고회사를 차려 업계 물량을 독식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안정되고 편해지니까 불안해지더라. 편한 게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1993년 영화사를 차렸다."
―'빚 갚으려고 영화 만들었다'는 말을 자주 한다. 감독이 돈 얘기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닌가?
"영화 수입한 게 실패해 빚을 많이 졌다. 영화로 빚졌으니 영화로 갚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데뷔작 '키드캅' 후 10년 만에 '황산벌'도 찍었고, '왕의 남자'도 내가 감독을 맡았다. 빚을 지는 건 나쁜 게 아니지만, 빚지고 게으르면 나쁜 놈이다."
―권력, 아니 '메이저'에 대해서는 늘 삐딱한 시선이다. 연출작뿐 아니라, '간첩 리철진' '공포택시' '아나키스트'같이 당신이 제작한 영화에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권력은 소수집단의 이익을 옹호하는 수단 아닌가. 피지배자들이 세상의 주인이다. 전쟁 나서 죽는 건, 왕이 아니라 백성이다."
―연산이 광대를 불러 놀게 하고, 대신들을 처단하는 대목 등 '고증'에서 논란이 될 부분이 많다. 두렵지 않나?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의 기록일 뿐이다. 연산군 얘기? 반정에 성공한 사람들의 기록이다. TV에서 본 건데, '조선왕조실록', '설중매'를 쓴 신봉승씨가 그러더라. '연도하고 이름만 같으면 다 바꿔도 된다'라고. 그런 대가가 말하는데 나 같은 피라미가 뭘 겁낼까."
―'황산벌'의 성공에도 불구, 어떤 평론가는 "이준익은 연출력이 없다"고 했다. 이번에는 "연출력이 향상됐다"고들 한다.
"이번에는 화장을 시키고 분도 좀 예쁘게 발랐지. 그런데 그게 연출력인가? 그건 기술이다. 연출력이 대체 뭔가? 감독에겐 크리에이티브(창의성)보다 커뮤니케이션(소통)이 더 중요하다. 두 시간짜리 영화를 감독 머리 하나로 커버한다? 말도 안 된다. 감독, 배우, 제작자 다들 '이건 내 영화'라고 우기기 시작하면, 결국 나중에 "내 영화 어디 갔지?" 하는 꼴을 당한다. 한 통에 넣어 버무려야지. 나는 내 머리 30%만 쓰고, 남의 머리 70%를 빌린다."
―영화를 전공하지도, 조감독도 거치지 않고 감독이 됐다. 당신과 같은 마이너의 성공은 무얼 의미하는가?
"객관은 메이저고, 주관은 마이너라 치자. 그러면 '오늘'의 객관은 '10년 전'의 객관과 동일한가. 오늘의 객관은 10년 전 누군가의 주관이었을 것이다. 같은 이치로 오늘의 누군가의 주관이 10년 후 객관이 될 것이다. 다수와 소수는 끊임없이 바뀐다. 그게 인류 진화의 법칙 아닌가."
이준익은…
1959생. 세종대 회화과 2년을 중퇴하고, 합동영화사 도안사(디자이너), 선전부장을 거쳐 1993년 영화사 '씨네월드'를 만들고, 아동 영화 '키드캅'으로 데뷔했다. 씨네월드는 '간첩 리철진' '아나키스트' '공포택시' '달마야 놀자' 등을 제작했으나, '두 발 빠른 기획'으로 흥행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이 감독은 다시 도전하고 싶은, 가장 아쉬운 영화로 '아나키스트'를 꼽는다. 배우 정진영은 씨네월드에 '충무로 알 카에다'라는 별명을 붙였다. 백제 멸망 과정을 질박한 경상도·전라도 사투리로 쏟아내고, '정사(正史)'를 뒤집어 해석한 영화 '황산벌'이 300만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감독으로서의 전성기'를 열었다. 김태웅 작·연출의 연극 '이(爾)'를 원작으로 한 '왕의 남자'(주연 감우성 이준기)는 개봉 9일 만인 6일까지 2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입력 2006.01.06. 19:13업데이트 2006.01.07.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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