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화의 베스트셀러 소설 '영원한 제국'에서 주인공 이인몽과 연암 박지원이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보수적인 젊은이 이인몽과 진보주의의 첨병으로 이름 높았던 나이든 박지원이 대화를 한다. 주인공 이인몽은 박지원을 보면서 비록 추구하는 바는 다르지만 자신보다 더 신선한 생각을 가진 박지원에 대해 호감을 품게 된다.

작가는 여기서 둘의 나이가 반대라 해도 믿을 것 같다는 의견을 덧붙인다.
확실히 안전한 것만 찾고 생각이 굳어져 일찍 늙어버린 젊은이와 아직도 도전과 용기를 기꺼이 받아버리는 나이든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필자는 믿는 편이다.

특히 요즘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배우, 백윤식이 바로 그것을 온 몸으로 증명해 주고 있어서 참 기쁘게 생각한다.
그가 이번에 출연한 영화는 '싸움의 기술'로 초절정 부실 고딩인 재희에게 아주 실용적인 싸움의 기술(침 뱉기, 흙 뿌리기, 눈 찌르기, 동전던지기 등)을 전수해주는 은둔형 고수역을 맡았다.

KBS 공채 탤런트 9기로 데뷔 후 전설의 고향 등 몇몇 굵직한 드라마에 출연하는 동안 백윤식은 미남연기자란 평가와 함께 중후한 사장역으로 고정될 뻔했다.
하지만 백윤식은 김운경 작가의 히트 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지적이긴 하지만 엉뚱하기 그지없는 미술선생으로 돌아와 사람들을 포복절도 하게 만들었다.

그것도 일부러 웃기려고 오버하는 것이 아닌 '너는 웃어라. 나는 가겠다' 식의 마이페이스식 유머였다.
이후의 연기행보도 철저히 '마이 페이스'였다. 컬트영화 '지구를 지켜라'에서 외계인으로 오인받는 강사장, '범죄의 재구성'에서는 중후해 보이지만 질투심 많은 사기꾼 대장 김선생,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변비 걸린 김부장 등 그 나이 또래의 중년이 맡기 힘든 역할만 골라서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파란이 처음 런칭했을 때, 랩을 립싱크 하는 그를 모델로 쓴 것도 오직 '백윤식'이 가진 낯설고 재미있는 매력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제 백윤식은 점잖지만 권위적이고 굳은 중년이 아닌, 뭔가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갖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굳어지지 않는 그의 행보는 바로 평소모습, 촬영장에서 연기를 한창 할 때에도 드러난다.

그와 함께 이번 영화 '싸움의 기술'에 출연한 재희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백선생님은 나를 후배가 아닌 동료 연기자로 대해주셨다. 아무리 까마득한 선배지만 일일이 참견하고 자기 스타일대로 가르치려 들지 않고 대신 '그 역할은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하는 거라며, 자신이 이래라 저래라 할게 아니다'라고 딱 잘라 이야기 했다"
대신 시나리오를 항상 숙지하고 있으며 열심히 체력을 관리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또 다른 카리스마를 느꼈다고 한다.

진정한 젊음은 고운 피부나 넘치는 체력이 아니라, 얼만큼 생각이 유연하고 사고가 트여있느냐이다.
이제 중견을 넘어 연예계의 대선배의 위치에 오른 백윤식이지만 굳이 후배 배우들의 선배라고 불리기 보다는 '동료배우'로 같이 공부해 나가는 그가 바로 진정으로 젊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스포츠조선 김민성 MTM 대표 / 서울종합예술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