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1906년)가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역사 추리 소설로 일가를 이룬 소설가 김탁환씨가 한국 소설사 100주년을 기념하는 단편 소설 ‘신(新) 혈의 누’를 보내왔다. ‘혈의 누’ 발표 200주년이 될 2106년 한반도 상황을 상상한 SF 소설이다. 100년 전 청일 전쟁의 아수라장이 됐던 한반도가 2016년에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으로 또 한번 전쟁의 위협에 직면한다는데,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105년 12월 31일이 푸른 별에서의 마지막 하루가 될 줄 알았다면 오늘까지 '혈의 누' 200주년 기념 소설을 쓰겠다는 약속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1906년을 배경으로 '피냐 눈물이냐'는 흑백영화를 만든 적은 있지만 복고풍에 기댄 매설가(賣說家)가 어디 나 하나뿐인가. '피냐 눈물이냐'의 고증자문을 맡은 김옥련만 봐도 나보다 훨씬 그 시절을 즐겨 복식과 말투까지 흉내 내다가 생활양식 공동체(Lifestyle Enclaves)까지 꾸리지 않았는가.

소설 청탁에 응한 것은 두 가지 이유다. 200년 전 신문의 재질과 활자를 복원하여 특별한정판으로 '종이'신문을 만들겠다는 말에 솔깃했고, 청탁을 한 이가 조선일보 문화국 소속이 아니라 우주국장이라는 점이 또한 흥미로웠다. 멸균처리를 여러 번 거쳐도 유해균이 종이에 서식한다는 보고서가 한국대학교 청(靑)교수 팀에서 발표된 후 종이신문이 전자신문으로 대체된 지도 반 백 년이 넘었다. 종이에 대한 인간의 마지막 애착마저 말살하려는 디지털미디어연맹의 음해라는 풍문이 돌았지만 물증이 없었다.

종이와 함께 사라진 것이 땀과 눈물이다. 균을 옮기는 액체를 제거하여 질병을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땀 대신 체온조절을 하고 눈물이 없어도 망막건조를 막는 칩을 귀밑에 부착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공공장소에서 땀과 눈물을 흘리는 자는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이제 '눈물이 앞을 가린다'거나 '방울방울 땀방울'과 같은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1세기 이전의 삶이 영상으로 첨부된 '고어사전(古語辭典)'을 뒤져야 한다.

요즈음 한반도의 젊은이들 사이에선 '마오쩌둥 어록'을 들으며 대륙을 누비는 여행이 선풍적인 인기다. 해마다 서너 명이 탈진하거나 풍토병에 걸려 목숨을 잃지만 무모한 도전은 줄어들지 않았다. 아메리카 드림에서 차이나 드림으로 꿈이 바뀐 이유는 지나치게 투명하고 간단하다. 두 제국이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긴 평화가 지속되자 나머지 소국(小國)들은 경제적 이익을 따라 말을 옮겨 탔다.

한반도만 해도 중국과의 교역량이 미국의 세 배를 넘자 제1외국어가 영어에서 중국어로 바뀌었고, 다섯 배에 이르자 국제회의석상에서 중국의 주장에 반대하기 어려워졌다. 열 배에 이른 지금 중국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는 일도 국회의 최종 승인만을 남겨두고 있다. 중국식 발음을 능숙하게 구사하기 위해 혀만 중국인의 것으로 교체한 인구가 천 만 명이 넘었다. 아예 중국의 한 주(州)로 들어가자는 주장까지 대두되었지만, 이번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오히려 중국 쪽에서 여유를 두고 차차 의논하자는 입장을 전해왔다. 중국은 1592년 7년 전쟁을, 미국은 1950년 3년 전쟁을 되짚으며 한반도에게 혈맹(血盟)을 강조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짓밟으며 러시아로 진격한 당시 국제 정세를 담은 풍자화. 프랑스 언론인 비고가 1904년에 그린 작품이다. 조선일보 DB사진.

두 제국의 중심부에서 동시에 폭발물이 발견된 것은 경악할 만한 일이다. 다행히 테러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제국의 분노는 하늘에 닿았다. 기억에도 희미한 암살의 역사가 일일이 들추어져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다시 한반도가 주목 받기 시작했다. 분쟁이 사라진 지도 반 백 년이 넘었지만, 제국의 시민은 자신들을 공격한 테러범의 흉측한 얼굴에 침 뱉기를 원했다. 때마침 두 제국 모두 평의회 의원 선거를 코앞에 두었기 때문에 이런 열망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밤사이 두 제국의 중심부에 거주하던 한반도 출신 천 명이 안전조사를 이유로 체포되었다. 한반도를 떠난 비행기는 제국의 영공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회항했다. 백 년 전 테러범을 체포하지 못한 것도 그들이 한반도로 숨어든 탓이라는 유언비어까지 버젓이 등장했다. 소국들 역시 제국에게 의심받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한반도로 의심이 집중되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다. 평화와 대타협의 땅이 하루 만에 테러의 진원지로 돌변했다.

두 제국에서 동시에 회담을 중단하고 대표단을 철수한 지도 열흘이 지났다. 비(非)제국지역을 대표하여 참석한 네 나라 대표들도 덩달아 일손을 놓았다. 90년 전, 이곳 개성에 푸른 별 상설 평화 회의장이 들어서곤 처음 있는 일이다. 푸른 별의 평화와 관련하여 하루에 처리할 의제가 500건이었으므로, 벌써 5000건의 위험이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열흘만 더 지나면 전쟁 상황에 돌입한다고 여섯 나라 과학자들이 힘을 모아 회의장 지하에 만든 피스 컴퓨터(Peace Computer)가 경고했다.

이십 일이면 제국 중심부에서 전쟁 준비를 끝마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네 나라 대표들은 공동명의로 두 제국의 조속한 동참을 바라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공식적인 답변은 없었다. 50년 만에 출몰한 테러는 세계를 예측 불가능의 범주로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