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단풍이 절정이던 지난 10월, 경기도 가평군 북면 해발 1468m 고지에 위치한 '공군 화악산 부대'가 발칵 뒤집혔다. 총기 난사 사건 때문도, 탈영병 도주 사건 때문도 아니다. 이호석(42) 대대장의 눈을 왕방울만 하게, 그러잖아도 큰 입을 함지박만 하게 만든 건, '로봇 태권 브이'! 막사 내 노래방 한쪽 벽, 태권브이가 날개 달린 국방색 탑차를 타고 구름 위를 유유히 날아가는 해괴한 그림 앞에서 할 말을 잃은 대대장은, 잠깐의 침묵 뒤 그를 둘러싼 80명 사병들을 향해 마침내 '폭탄선언'을 했다.
"음, 좋아. 멋진 걸? 이걸 래커 하나로 그렸단 말이지. 그럼 나머지 세 벽도 다 그려보지 그래."
순간 "꺄오~" 쾌재를 부르며 머리가 천장에 닿도록 뛰어오른 건 헌병대 소속 황영훈(20) 일병(당시 이병). 군기가 생명인 군대에서 언감생심, 막사 내벽을 온통 '낙서'(그라피티)로 도배한 주인공이다. 그것도 고참 병장 셋을 동원해 노래방은 물론 쓰레기장 외벽, 최근엔 체력 단련장 내벽까지 1960년대 뉴욕 할렘가의 저항문화를 상징하는 그라피티 벽화로 물들였다.
"군기가 빠져서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날개와 구름은 공군, 탑차(트럭을 버스처럼 개조해 일명 '뻐럭'으로 불리는 화악산 부대용 승합차)는 저희 부대를 상징합니다. 격오지 복무에서 오는 화악산 부대 최고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죠."
서울서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인 가평이 격오지라니…. 이유가 있다. 공군 30 방공관제단 소속 화악산 부대는 육·해·공군을 통틀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한 레이더 기지. "아침에 창문을 열면 제일 먼저 구름이 밀려 들어온다"는 김병만(20) 병장은, "자대 배치를 받고는 좋아서 껑충껑충 뛰다가, 덜컹대는 탑차를 타고 화악산 정상까지 올라오는 동안 엉엉 우는 곳이 우리 부대"라고 소개했다.
눈도 '징하게' 오고, 바람도 거세다. 10월에 첫눈이 내리면 평균 기온 영하 21도, 체감온도 영하 40도로 이듬해 4월까지 지속되는 겨울. "다른 부대는 눈을 치우기 위해 빗자루를 꺼내지만 우리는 삽부터 꺼낸다"고 할 만큼 1년의 절반을 방한복을 입고 지낸다.
"그래서 허락했습니다. 군대가 사회로 나가기 전에 맞는 면역주사라면 우리 부대는 가장 세고 아픈 주사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이호석 대대장)
벽화를 그릴 때만큼은 계급도, 서열도 없었다. 중3 때 남의 집 담벼락에 '울트라맨'을 그린 뒤 그라피티 세계에 입문해 보육원·초등학교·교도소 담장까지 자원봉사로 섭렵한 황일병이 '지휘관'. 평소 만화와 사진에 관심이 있던 헌병대 반재승(23) 병장, 이수원(21) 병장이 "나도 배워보겠다"며 '참모' 겸 '조수'로 합류했다. '노래방 벽화'는 밤샘 초소 경비를 하는 틈틈이 '모의'했다. "헌병대 20명 전부가 참여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일과 후 장교들이 산 아래 관사로 내려가면 자유시간인데 밤늦게까지 벽화를 그리면서 고참, 신참 사이에 속엣얘기도 실컷 털어놓았죠."지금은 시찰 온 '별'(장군)들까지 눈을 반짝이며 구경할 만큼 화악산 부대 명물이 됐다. 솜씨도 수준급이어서, 지난달엔 서해안 망일산 공군부대 막사로 '벽화 원정'을 다녀왔다.
1월 1일엔 전 부대가 가평군 주민들과 함께 신년맞이를 한다. "운해에서 떠오르는 해돋이가 장관이거든요. 삭막한 막사를 오색 빛깔로 물들인 우리 벽화처럼요." 새해 소원을 묻자 장병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제발 눈 좀 안 왔으면 좋겠습니다. 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