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지역은행' 효시는 '호남은행'이었다. 일제시기였다. 1920년 8월 문을 열었다. 이 당시 출자자는 광주와 전남지역의 지주들이 중심이었다. 전북지역 지주도 일부 포함되었다. 현전 자료에 따르면, 1931~38년 호남은행 주주는 159~262명으로 대지주의 주식비중이 53~68%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은행의 경영원칙에는 '은행에서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일본인 직원을 채용하지 않는다' '일본인 및 일본관계 단체에 일절 융자를 하지 않는다'는 세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총독부의 특별감사를 받고, 1942년 동일은행에 강제 합병당했던 역사를 갖고 있다.
이 호남은행 설립의 주역은 현준호(玄俊鎬,1889~1950)였다. 그의 조부대에 이미 3천석의 대지주였다. 그는 1906년 고정주(高鼎主)가 세운 전남 창평군 창평면 월동 영학숙(英學塾)에서 영어를 배웠다. 당시 동문수학한 사람이 전북 부안의 김성수, 담양의 송진우, 장성의 김시중 등 이었다. 당시 신학문인 '영어'는 실용적인 도구과목. 그래선지 몰라도 이들에게서는 실용적인 면모가 두드러졌다.
현준호는 이후 서울 휘문의숙을 거쳐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동경에서 역시 유학중이던 김성수와 송진우, 김병로, 백관수, 신익희, 김준연 등과 교유했다. 귀국한 뒤 1923년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전남도평의회원, 중추원 참의를 거쳤고, 대규모 간척사업을 벌였다. 중일전쟁 이후 시국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해방 이후 반민특위에 소환되기도 했다. 요즘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그의 손녀다.
아무튼 현준호의 역할이 두드러졌던 이 호남은행은 사적으로는 조흥은행과 연결되고 있다.
최근 광주·전남에서 광주은행을 지역의 품으로 되돌리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당초 광주·전남 지역상공인들이 설립했기 때문. 광주은행이 부실경영으로 IMF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품을 떠났던 것을 원상회복하자는 것이다. 현재 자산가치는 1조원대, 우리은행 그룹 소속이다.
역사와 배경은 다르지만 두 지역은행이 곡절을 겪어온 것 만은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광주은행인수에 반대의사를 보이고 있다. '부실경영'을 되풀이할 수 는 없다는 이유다. 과연 '지역은행'을 지역의 품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입력 2005.12.01.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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