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끝 해남에는 어란(於蘭)이란 작은 포구가 있다. 바다도 너무 깊어 언제나 검은 빛이었고, 조난이 잦아서 포구 끝에 등대 하나가 서 있으니 눈부신 빛이다. 흰 빛과 검은 바다."
김지하 시인은 그의 문학을 감싸는 후광(後光) 속에 깃든 풍경을 더듬어 흰 빛과 검은 바다를 만난다. 흑과 백은 서로 뒤엉킨다. '소리없는 아우성'과 같은 모순 어법이 가능해지는 시의 차원에서, 흰 빛과 검은 바다는 '흰 그늘'이란 김지하 특유의 모순 어법을 낳는다. '흰 그늘'은 담시(譚詩)와 대설(大說), '애린' 연작시 등등 김지하가 거쳐온 시적 행로에 드리워져 있을 뿐 아니라 현재 그리고 앞으로 김지하 문학이 나갈 길 앞에도 짙게 깔려있다. '흰 그늘'은 김지하가 추구하는 민족 미학의 원리를 담은 한 편의 시와 같은 용어이기 때문에 시인의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 책은 김지하의 강연록을 중심으로 민족 미학의 원리를 찾아간다.
'흰 그늘'을 이해하기 위해서 김지하는 판소리와 탈춤을 먼저 감상하라고 주문한다. 한국적 전통 예술의 독창성을 대표하는 판소리와 탈춤에서는 똑같이 '그늘'이란 경지가 있다. "저 사람 소리에는 그늘이 있다"고 할 때 그 소리꾼은 최고의 찬사를 받는다. 인생의 쓴맛 단맛이 녹아있는 소리와 춤사위에서 한국적 미학의 핵심인 '그늘'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 전통예술에서는 삶의 윤리적 측면과 미학적 측면 또는 예술적 측면을 삶의 구체적인 인생 역정에 직결시켜서 봤던 겁니다"라고 김지하는 설명했다.
그렇다면 '흰 그늘'은 무엇일까. "빛을 품은 어둠, 뭔가 안에서 큰 외침을 가지고 있는 듯 하면서도 자기가 애써 억누르고 있는 침묵, 이것과 반대되는 것이 서로 얽혀 이런 것이 굉장히 높은 경지에 있다고 할 때 흰 그늘이라고 부르는 겁니다"라는 것이다. 김지하는 한국 현대시사에서 '흰 그늘'의 미학을 선구적으로 구현한 시인으로 정지용을 꼽았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라는 정지용의 시 '유리창'에서 '외로운 황홀'이란 이미지가 '흰 그늘'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침묵으로 쓰는 거예요. 말을 많이 쓰지 않고도 자기 주제를 표현하는 사람이 우수한 시인이죠. 공처(空處)의 시인, 즉 틈을 벌려주는 겁니다. 외로운 황홀, 그것은 신에 대한 호소입니다. 가톨릭적이죠."
'가톨릭과 소위 유럽의 모더니즘과 우리 민족적인 서정이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세 가지를 같이 묶어놨던' 정지용에 대해 김지하는 이성과 감성, 영성(靈性)을 통합한 예술가였다고 평가한다.
김지하는 그래서 '흰 그늘'의 핵심은 서로 엇갈리는 것들을 통합하는 상생과 조화의 미학이라고 역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