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조선 교구 제2대 교구장이었던 앵베르 주교와 동역자 모방, 샤스탕 신부는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이 땅에서 함께 순교했다. 16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신부들의 고향에서 온 순례단이 "나라는 달라도 같은 순교자를 선조로 모신 형제"라고 말했다는 데서 진한 역사의 인연이 느껴진다.

모방, 샤스탕 신부의 밀입국을 주선했던 이가 정약용의 조카 정하상(鄭夏祥)이다. 그의 부친 정약종(丁若鍾)과 형 철상은 정조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듬해(1801), 집권 노론이 정조 때 성장한 남인 제거를 목적으로 일으킨 신유박해로 함께 사형당했다. 이때 정하상의 나이 만 6세였는데 백부 정약전과 숙부 정약용은 유배되고 사촌 매형 황사영은 충북 제천 배론으로 피신했다가 능지처참되어 온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러나 정하상은 어머니 문화(文化) 유씨(柳氏)의 인도로 동생 정정혜와 신앙을 받아들였고 지하 교계의 지도자가 되었다.

1783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인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간 고모부 이승훈이 천주교회를 찾아 영세받기를 자청해 벽안의 신부들을 놀라게 한 것처럼 정하상도 1816년 동지사 역관(譯官)의 종으로 북경 천주교회를 찾아 신부 파견을 요청했다. 이때의 신부 파견 요청은 무산되었으나 정하상은 전후 9차례나 북경을 몰래 방문해 거듭 요청했고, 끝내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게 청원해 신부 파견을 성사시켰다. 앵베르 주교는 정하상을 조선 최초의 신부로 만들기 위해 신학교육을 시켰으나 결실을 보기 전에 기해박해가 발생한 것이다. 이때 세 신부는 물론 정하상과 모친, 여동생도 함께 순교해 모두 103위 성인으로 시성(諡聖)되었다.

정씨 일가의 순교의 씨앗은 정약종이 뿌렸다. 옥중에서 고문을 받던 유씨의 꿈에 남편 정약종이 나타나 '천국에 3개의 방을 마련해 놓았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왠지 정약종·철상 부자는 성인으로 시성되지 못했다.

새 교황시대에 한국 천주교계가 새 추기경 탄생을 바라는 마음 못지않게 추진해야 할 일은 정약종·철상 부자를 성인으로 추성(推聖)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