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을 잘 못 맞춰서 새로 써야겠어."
3일 오후 1시쯤 경북 안동교회 부속 가옥. 검정 볼펜으로 영어 성경을 두 줄쯤 베껴 쓰고 있던 최의숙(崔義淑·90) 할머니가 노트 한장을 '북~' 하고 찢어 휴지통에 버렸다. 최씨는 글씨나 줄이 조금이라도 성에 안 차면 가차없이 종이를 찢어 버린다. "나는 매일 이런 식으로 써."
최씨에게 성경 필사는 기도이자 예술이다. 안동교회 김광현(金光顯·93) 목사의 아내인 최씨는 지금까지 신약·구약 성경을 국어·영어·일어로 각각 4번씩 베껴 썼다. 3개국 언어로 성경을 12번 필사한 셈이다.
최씨의 조그만 책상 위에는 스탠드, 검은색 볼펜, 빨간색 볼펜, 국어·영어·일어판 신약·구약 성경, 그리고 가족사진이 놓여있었다. 성경들에는 손때가 까맣게 묻어 있었다.
성경 필사의 대명사로 꼽히는 독일 수도사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는 성경을 네 번 필사했다. 최씨의 필사 횟수는 켐피스보다 3배 더 많다. 최씨가 성경을 한 번 베껴쓰는 데 국어와 일본어는 약 1년6개월, 영어는 약 2년이 걸렸다. 25년의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덕분에 최씨는 성경 수백절을 3개 국어로 줄줄 암송할 정도가 됐다.
최씨는 그동안 4곳에 국어·영어·일어 성경필사본을 각각 선사했다. 첫 필사본 21권은 장남인 서울 벧엘교회 김서년(59) 목사에게 건네며, "철저히 말씀대로 목회하라"고 당부했다. 차남인 문창교회 김준년(57) 집사에 이어 막내아들인 안동 성소병원 김무년(55) 원목실장은 지난 8월 3개 국어 성경 필사본을 받았다. 최씨는 그전에 평생 몸 담았던 안동교회 도서관에도 기증했다.
하루 열시간씩 성경을 옮겨 쓰니 어깨가 무너질 듯한 통증이 밀려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또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다 보니 오른쪽 어깨가 왼쪽 어깨보다 올라갔다. 허리도 구부정해졌다. "포기할까…." 그때마다 최씨는 책상 위에 놓인 가족사진을 보며 힘을 냈다고 했다. "한 자 한 자 쓸 때마다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썼어. 내가 자식들한테 뭘 물려줄까 고민했는데 성경말씀밖에 없었어."
목사아버지 밑에서 자란 최씨는 어려서부터 선교사에게 귀동냥으로 영어를 배웠다. 일제시대에 세이와여자대학(聖化女子大學)을 다녀 일어도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안다.
성경을 베껴 쓰면서 최씨의 생활이 바뀌었다. 비록 신체는 고달팠지만 고혈압증세도 없어졌고 침침했던 눈도 나아졌다. 돋보기를 안 쓰고 성경을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정신력이 좋아져서 그런 것 같아. 이 나이에 뭔가 할 게 있다는 것도 즐겁고…."
완성된 성경필사본은 남편인 김 목사가 교열을 본다. 막내아들인 김무년 목사는 "두 분이 금슬 좋게 성경얘기를 하시는 것을 보면 '이게 행복이구나 싶다'"고 했다. 장남 김서년 목사는 "어머니께서 주신 성경필사본이 가장 고귀한 보배"라며 "어머니께서는 성경을 쓰심으로 해서 오히려 건강을 지키시는 것 같다"고 했다.
최씨는 "자신이 성경을 베껴쓰는 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했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사랑'이야. 성경의 본뜻이 자식들에게 전달되고 내 사랑이 자식들에게 전달됐으면 해."
최씨의 다음 목표는 출가한 두 딸에게 줄 성경필사본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때까지만이라도 건강했으면 좋겠어. 하나님, 나 상(賞) 줘야 해요.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