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우슈 챔피언(권민기), 이종격투기 K-1 데뷔(유양래), 제주도 우슈 여자부 장권챔피언(오미정), 대학씨름 헤비급 챔피언(김진명)… 투박한 독립영화 '거칠마루'가 일반 관객에게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첫 번째 홍보 포인트는 이렇듯 출연 배우들의 화려한 무술경력. 하지만 최초 제작비 3500만원으로 시작한 저예산 무술영화가 스스로에게 찍는 방점은, 액션 그 자체 보다는 사람에게 있다. 16일 개봉을 앞두고 어렵게 시간을 맞춘 '무술하는 배우'들은 "다른 액션영화처럼 복수나 피가 중요한 게 아니다. 진정한 무술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발견할 수 있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영화 '거칠마루'는 인터넷 무술사이트에서 최강으로 군림하는 전설의 고수 '거칠마루'와의 대결을 원하는 무술인 8명의 이야기. '거칠마루'는 "거침없는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신라시대 화랑에게서 따온 이름이다. 전국 방방곡곡으로 '고수'를 찾아 다니는 무인들의 삶을 다뤄 인기를 얻은 KBS 다큐 '인간극장-무림일기편'(2000)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김진성 감독이 5년간 씨름한 프로젝트다.

실제로 10여 년 안팎 수련을 거친 무술인들이 직접 카메라 앞에 섰다는 점에서 '거칠마루'의 액션은 흥미롭다. 대련할 때마다 족족 나가 떨어지지만 말싸움 솜씨는 9단인 '천장지구'역의 성홍일(34) 만이 대학로 연극무대 출신이고, 나머지 7명은 절권도, 우슈, 택견, 씨름, 무에타이로 단련된 '무예 고수'. 하지만 "모두 합치면 몇 단이냐"며 호사가적 호기심을 드러냈을 때, 택견 고수 장태식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 분야에서 최고도 아니지만, 단(段) 개념 자체가 실력을 드러낼 수 있는 절대적 기준도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대신 에둘러 표현할 수는 있겠다. 이들이 무술을 배워 온 시간을 모두 합하면 거의 100년에 육박한다. 이날 자리를 함께 한 장태식(택견·15년), 오미정(우슈·6년), 유지훈(절권도 등·10년), 김진영(씨름 등·18년) 등은 물론, 이종격투기 일본 무대(K-1) 데뷔와 군복무 등의 이유로 나오지 못한 유양래 최진용 권민기도 대략 비슷한 경력이라고 했다. 홍일점인 오미정은 "무술을 승자와 패자,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오해는 버렸으면 좋겠다"면서 "패배는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무너지지는 않는 것이 무술인의 삶이며, 동시에 우리 영화가 지향하는 바"라고 똑부러지게 요약했다.

실제로 영화 '거칠마루'가 다른 액션 영화와 갈라지는 것도 이 지점이다. 전설의 고수와의 일합(一合)을 위해 토너먼트 대결을 벌여야 했던 8명은, 냉정한 사투가 끝난 뒤에는 서로를 감싸 안으며 한 단계 더 성장했음을 자축한다. 영화에서 조폭 분위기의 막싸움꾼인 유지훈은 연방 싱글싱글 웃으며 "우리 영화는 무협액션이라기 보다는 버디 무비(buddy movie)에 가까울 것"이라고 했다.

이야기가 무르익으며 화제는 '진정한 무술영화'로까지 번져나간다. KBS '인간극장'과 영화 '거칠마루'에서 모두 주연을 맡았던 장태식은 "우리나라에는 액션 영화만 있고 무술영화는 없다"고 단언했다. "어렸을 때 태권도장 한 번 안 다녀 본 사람 없듯이, 인구 대비 무술 수련자의 수는 가장 많은 나라인데도 그렇다"는 것이다. 내내 침묵을 지키던 씨름선수 출신 김진명도 "무술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자부심을 관객들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수십억을 들인 상업영화 만큼의 '때깔'과 '스타'는 없지만, '거칠마루'에는 날것 그대로의 격투와 자신을 찾기 위해 몸을 던지는 무인들의 삶에 대한 태도가 진하게 녹아 있다.

'서프라이즈'(2002)로 데뷔한 뒤 이 영화가 두 번째 작품인 김진성 감독은 "예술영화 전용상영관인 아트 플러스 체인을 포함, 저예산 독립영화로는 예외적으로 전국 15개 극장에서 개봉할 수 있게 됐다"면서 "독립영화감독 후배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