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호

"열 살 때 8·15를 맞았다. 일본이 항복하고 전쟁이 끝났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 더 이상 방공호를 파지 않아도 되고, 솔뿌리를 캐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때는 (휘발유는 전쟁물자라) 송진을 태워서 자동차 연료를 얻었다. 나 같은 국민학교 5~6학년들이 하루는 수업하고, 하루는 산에 가서 솔뿌리를 캤다. 2인1조로 곡괭이와 톱을 들고 벌거숭이 산에 가서 송진을 캐서 가마니에 담아 나르는 일이 힘들고 지겨웠다."

영문학자, 문학평론가, 시인으로 활동해 온 유종호(70) 연세대 특임교수는 60년 전 8월 15일의 기쁨을 되살리면서 동심의 세계로 잠시 돌아갔다. 충북 충주 남산학교 5학년 학생이었던 유 교수는 방학인데도 매일 학교에 가서 사람 가슴 높이까지 오도록 참호를 팠다. 항복 소식을 들은 것은 15일 오후 3시쯤이었다. 거리에 나갔다 돌아온 이종 사촌 누이가 전해줬다.

유 교수는 8·15와 6·25라는 역사적 사건을 겪으면서 소년기를 보냈다. 흔히 소설에서 아이의 눈으로 역사의 격변기를 형상화하는 것을 두고 비평가들은 '순진한 눈의 관점'이란 용어를 쓴다. 유 교수는 '순진한 눈의 관점'을 동원해 지난해 8월 '나의 해방 전후'라는 책을 펴낸 적이 있다. 1940~1949년 고향의 풍경을 회상한 이 책은 "평범한 개인사의 추억을 통해 생생한 역사를 증언한 기록 문학"이란 호평을 받았다. 광복 60주년을 맞아 유 교수는 다시 열 살 소년으로 돌아갔다.

―광복 직후, 열 살 소년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16일 학교에 갔어요. 담임인 니시하라(西原) 선생이 칠판에 이종환(李鍾煥)이라고 한자로 쓰더니, 우리들 보고 집에서 부르는 이름과 성을 대라고 해요. 그동안 줄곧 일본 이름으로 통하던 우리들은 서로 한국식 이름을 소개하면서 참으로 기이한 광복 의식을 치렀습니다. 저는 그것을 '기이한 통성명'이라고 기억합니다. 교장 선생이 운동장에서 조회를 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앞으로 방공호를 파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는데, 한국어로 했는지 일본어로 했는지 도저히 기억이 안 납니다."

열 살 때 광복을 맞은 유종호 교수가 조선일보 인턴기자 장수민(서울대 역사교육과 4학년)씨에게 60년 전 8월의 추억을 들려주고 있다. 이명원기자 mwlee@chosun.com

―통상 사용하던 언어가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 말씀입니까.

"일본이름으로 서로 통용되던 시절입니다.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국어(國語)로 썼고 동쪽에 있는 일본 천황의 궁전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을 당연시했던 탓이지요."

―엊그제가 히로시마 원폭이 떨어졌던 날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을 그때 알고들 있었습니까.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사람들은 '신형폭탄'이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교장 선생은 '일반 국민이 더 많이 죽었다'라며 '국제법을 위반한 적을 응징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그렇게 우리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은 8월 15일이 지나도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우리들에게 변명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말을 되찾았다'고만 했지요."

―그 후엔 한국어로 수업을 했겠지요.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한 달 지나서 9월 20일 전국적으로 개학을 했어요. 출석을 부르면 아이들이 습관적으로 '하이'라고 대답했다가, 다시 '네'라고 하는 '하이, 네'가 한동안 반복됐습니다. '차렷'이란 우리말 구령이 나오기 전에는 일본어 '기오스케'를 그대로 우리 발음으로 읽은 '기착(氣着)'이란 구령을 썼습니다. 교과목 이름도 다 바뀌어서, '수신(修身)'은 '국민(國民)'으로, '역사 지리'는 '사회 생활'로, '도화(圖畵)'는 '미술'로, '창가(唱歌)'는 '음악'으로, '직업'은 '실업'으로 바뀌었죠. '국어' 과목만은 그냥 '국어'로 했어요. 그 전의 국어가 아닌, 한국말과 글을 가르치는 데 과목 이름은 그대로였으니 참 아이로니컬한 일이었죠."

―언어 생활에 적지 않은 혼란이 있었겠군요.

"학교 바깥에서는 우리말을 썼기 때문에 큰 혼란은 없었어요. 선생님 별명을 지을 때도 창씨개명한 이름 뒤에 우리말로 '맹꽁이'라고 붙였으니까. 그런데 우리말·글 배울 일이 생겼지. 미군정청이 만든 30쪽짜리 책자 '한글 첫걸음'을 전 학년이 떼야 했어요. 더 이상 일본어를 쓰지 않아도 됐지만, 아이들 사이에는 한국어와 일본어를 합성한 말놀이가 유행했어요. 가령, 여우를 일본말로 '기쓰네'라고 하는데, 아이들은 '여우가 도망가려고 기쓰네'라며 재미있어했죠. 돈을 뜻하는 일본말 '가네'를 갖고서 '돈이 데굴데굴 굴러 가네'라거나 호박을 뜻하는 '가보자'를 갖고 '호박 따러 가보자'라는 식의 말놀이를 즐겼는데, 마지막으로 일본말을 한번 써보자라는 심리가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광복 직후 충주 거리 풍경이 기억나십니까.

"엿장수가 많이 생겼어요. 단것이라고는 별로 없을 때라서 그랬던 모양이고. 집집마다 숨겨두었던 담뱃잎으로 제조한 담배가 대량으로 유통되면서 담배 장수도 많아졌죠. 미군이 진주했을 때 처음 본 지프가 신기했고, 미군이 쓴 챙 있는 모자가 멋있어 보였어요. 미군 쓰레기장에 가면 먹다 남은 것이 많았기 때문에 쓰레기통 주변을 왔다갔다하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선생님 고향에선 언제 광복을 실감했나요.

"16일에 사람들은 '좋다, 좋아'라고만 했는데, 17일이 돼서야 거리 행진을 펼치면서 '만세'를 불렀고, '올드랭사인' 곡조로 애국가를 불렀어요. 일본인들을 극장에 수용했다가 곧 다 풀어주었어요. 특별하게 기억나는 것은 중학생들이 일본인 교련 교관을 붙잡아 빙 둘러쌌던 일입니다. 교련 교관이 특히 못되게 굴었으니 가만 놔둘 리 없었죠. 교관이 무릎 꿇고 '모조리 잘못했습니다'라고 빌고 있는데 교관 부인인 듯한 여자까지 와서 빌자 학생들은 교관을 놔주었어요."

서정주詩 읽고 日軍 간 사람 없어

―당시 좌우 대립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까.

"중학생들이 좌우로 갈라져 골목길에서 패싸움하는 것을 종종 봤고, 국민학교 교원(교사) 중에 좌파가 많았지요.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좌파들은 약해졌고, 특히 충북 충주는 다른 지역에 비해 좌익이 약했어요. 읍장과 교장을 지낸 사람도 6·25 때 처형되지 않았으니까."

―과거사 청산과 친일 문제가 광복 60년 만에 사회적 과제로 등장했습니다.

"과거를 일률적으로 단죄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친일파를 옹호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운형도 일제 말기에는 총독부에 면종복배(面從腹背)했습니다. 박정희의 친일은, 그 양반의 삶의 그늘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빛과 그늘이 있습니다. 친일파는 한일합방 때 나선 일진회처럼 일제에 붙어 이익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런 친일파를 옹호할 생각은 없어요. 그러나 나는 문인들의 친일에는 동정의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일제 말기에 서정주가 친일 시를 썼다고 하지만, 당시 그 시를 읽고 감동받아 일본 군대에 간 한국인은 없습니다. 서정주가 누구인지도 모르던 판입니다. 진짜 친일 문인은 이광수뿐입니다. 나머지는 피동적으로 움직였다고 봅니다."

당시 지식인들 美國 과소평가

―일제 시대에는 좌파와 거리를 두었던 소설가 이태준 같은 문인들이 해방 직후 좌파에 동조한 까닭은 무엇이었습니까.

"시대 풍조였을 겁니다. 당시 지식인과 문인들은 신흥 세력으로 떠오른 소련에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미국을 과소평가했지요. 부자도 세월이 지나면 망할 것이라는 생각에 미국을 근시안적으로 봤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골고루 잘살게 해준다는 사회주의가 멋있어 보이지 않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