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라디오를 갖고 밭에 나갔지. 정오쯤이었을까. 뙤약볕 아래서 잡초를 뽑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무조건 항복'이라는 일본 천황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어.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로 감격스러웠어. 그 길로 개성 시내로 달려왔지.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확인하고 싶었어."
대표적인 개성상인으로 꼽히는 이회림(李會林·88) 동양제철화학 명예회장은 그렇게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을 맞았다. 그는 개성의 한 상점에서 무급(無給) 점원으로 출발해 국내 최대의 무역상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굴착기도 없던 1968년,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바다를 매립해 산업용 화학소재 기업(현 동양제철화학)을 설립했다. 또 최근에는 자신이 평생 모은 문화재 8400점을 미술관과 함께 인천시에 기증하기도 했다. 일제(日帝)와 광복, 6·25전쟁까지 격동의 시기를 헤쳐온 그가, 지난 29일 서울 소공동의 동양제철화학 본사에서 손자 이우현(동양제철화학 전무)·우정(불스원 사장)씨에게 광복 이후 우리 기업의 태동기를 들려주었다.
"제조업 일제장악… 그나마 고무·방직공장뿐
우리가 할 건 홍콩등과 무역업 밖에 없었어"
―광복 당시에 왜 농사를 짓고 계셨어요? 할아버지는 개성상인이 아닌가요?
"태평양 전쟁이 임박하면서 일본의 통제가 점점 심해졌어. 상점 점원으로 있다가 독립해서 돈을 좀 모으나 했는데, 일본이 물자통제령(1941년)을 발동했어. 모든 자금·설비·노동력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상공인들로 하여금 자기 물건을 마음대로 팔지 못하게 했지. 게다가 경제경찰제까지 만들어서 툭하면 상공인들을 데려가 조사를 했었는데,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가면서 장사를 하는 게 여간 힘들지 않았어. 그런데 조금 지나자 아예 기업정비령(1942년)을 발동해 군수관련 산업이 아닌 일반 상공인은 모두 문을 닫게 했지. 가게에서 일하던 젊은이들을 모두 징용으로 끌고 갔었어. 징용을 피하기 위해 개성 근처에 땅을 사서 농사를 지었어. 그러다가 광복을 맞은 거야."
―서울에는 언제 오셨나요?
"광복이 되면서 서울로 왔다. 광복 전에도 개성 상점에서 일하면서 서울로 출장을 많이 다녔단다. 아무래도 상권이 큰 서울에서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게다가 광복 이후 개성은 갈수록 혼란스러웠지. 일본인 주택을 습격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당시 개성은 남한에 포함돼 있고 송악산 위로 38선이 그어졌는데, 가끔씩 그쪽에서 총소리가 나기도 했었단다. 그래서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서울로 왔다. 지금의 종로 낙원상가 근처에 셋방살이로 가게를 열었지. 다른 개성상인들도 그 무렵에 서울로 많이 왔단다."
―당시 서울의 모습은 어땠나요?
"당시 서울은 4대문 안이 전부였어. 아마 서울 시내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 반도호텔이나 화신백화점 정도였을 것이야. 그래 봐야 10층도 안 됐지만. 그때만 해도 미아리 고개만 넘어가면 사람을 보기가 힘들었어. 개구리 우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고. 허허. 요즘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고 하는데, 당시는 모두가 가난한 절대 빈곤의 시대였어. 조·콩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하루 한 끼 겨우 먹는 정도였으니까. 걸인으로 전락하는 사람도 많았고."
―광복 당시 기업들은 어떤 게 있었나요?
"글쎄, 그때는 고무신을 만드는 고무공장이나 면방직 공장 외에는 별다른 공장도 없었지. 아마 경성방직 정도가 대표적인 기업일 것이야. 부산 사상 같은 곳에 제법 규모가 있는 고무신 공장들이 있긴 했었지. 하지만 일제 때 제조업은 일본인들이 장악했으니까 우리 기업들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었어. 그래서 우리 기업인들이 주로 했던 게 무역상이었어. 주로 홍콩에서 비단이나 식품을 가져와 한국에 파는 식이었지. 대신 여기서는 마른 오징어 같은 어류를 내다 팔고. 천우사·동아상사 이런 게 다 큰 무역상사였어. 나도 전경련 회장을 지냈던 고 이정림 대한유화 회장과 함께 '개풍상사'라는 무역회사를 차렸지."
―할아버지께서는 6·25 전쟁 때 피란을 안 가셨다면서요?
"안 간 게 아니라 못 갔어. 6·25 전쟁이 터지고 사흘 만에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는데, 어떻게 피란을 갔겠어. '국군이 잘 싸우고 있다'는 라디오 방송만 믿고 있는데, 느닷없이 인민군이 미아리고개 근처에 나타나더라. 그때 고관들이나 공무원들은 일찌감치 피란을 갔지만, 대부분의 상공인들과 시민들은 미처 피란을 못해 서울에 남을 수밖에 없었어."
―북한군이 주둔한 서울에 계시면서 위험하지는 않았나요?
"9·28 서울 수복 때까지 인민군 피해다니느라 힘들었지. 당시엔 돈 있는 사람들은 다 조사 대상이었고, 젊은 사람들은 징발 대상이었어. 나도 소상공인으로 돈이 조금 있다고 알려졌는지, 세 번을 종로경찰서에 잡혀가서 조사를 받았지. 무턱대고 잡아가서 이것저것 물어보고는 별게 없으니까 그냥 풀어주곤 했었지."
―사업은 어떻게 하셨어요?
"제대로 사업을 할 수 있었겠나. 전쟁 직전에 거의 전 재산을 투자해 홍콩에서 인견사(人絹絲) 110상자를 사들여 왔었어. 그걸 서울역 앞 창고에 보관해 뒀었는데, 항상 걱정이었지. 인민군들이 처음에는 손을 대지 않더라. 하지만 9·28 수복이 가까워지자 인민군들이 돈 되는 것은 다 가지고 후퇴하더군. 인민군들이 내 인견사도 가져가려고 했는지, 남대문 안의 한 창고에 옮겨두고 떠났다. 그걸 내가 사흘 밤낮을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며 되찾았어."
―1·4 후퇴 뒤에는 부산에서 사업을 하셨지요.
"당시에는 부산이 정치·경제의 중심도시였다. 부산역 근처의 동광동 일대에는 크고 작은 무역상들이 즐비했었다. 나도 부산으로 피란 가서 그곳에 한 200평쯤 되는, 2층짜리 건물을 얻었어. 당시 2층에는 같이 피란 온 중개인·직원 10여명이 기거했었단다. 전쟁 통에 집을 어떻게 구하겠어. 나도 집까지 1시간씩 기차로 출·퇴근하기가 힘들어서 아예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했지. 다들 고생이 심했지. 전쟁 때문에 물자부족은 심하지, 우리가 해외에 팔 물건은 없지. 기껏 수공업품이나 동물 모피 등을 수출하는 정도였는데, 툭하면 클레임이 걸려 손해를 보기 일쑤였어. 당시엔 달러가 모자라 아침마다 은행에서 상공인들을 대상으로 달러 경매를 했지."
―무역상으로 큰돈을 버셨다면서요?
"그러다가 운이 좋았는지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회사 중 하나인 대한중석에서 창연(납 제련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독점적으로 공급받아 재가공해 수출했어. 그 덕에 1953년에는 수출 1·2위를 다툴 정도였지. 그때 정부가 수출에 대한 공로로 준 상이 미국산 지프 3대를 무관세로 수입할 수 있는 권한이었어. 그때는 대단한 특혜였단다."
―그럼 본격적으로 제조업을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우리나라에 제조업다운 제조업이 시작된 것은 5·16이 일어난 다음이다. 나도 1950년대 후반에 탄광과 시멘트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동양제철화학을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제조업에 뛰어든 것은 1960년대 중반이야. 당시 바다를 매립하기 위해 갯벌 위로 철로 레일을 깔고 손수레로 돌을 날랐지. 신용을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렇게 맨주먹으로 기업을 일구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