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나지막한 기와집이 가지런히 늘어선 경주시 사정동 경주공고 뒤편 주택가.
"보는 사람은 좋을지 몰라도, 사는 사람은 죽을 맛이니더."
대문 안에서 부인(70)을 부축해 앞마당 화장실에서 나오던 박종욱(73)씨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마누래가 뇌졸중을 당해 대문 앞 재래식 밴소(변소)까지 가는 기 보통 고역이 아닌 기라." 이어 박씨는 "비 오면 또 천장이 샐 테니 마루에 다라이(대야) 갖다놔야 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문화재보호법상 '문화재 주변지역'인 이곳에서 화장실을 새로 지으려면 공사 전 발굴작업을 6개월간 해야 한다. 만일 발굴 도중 경주시가 '집 아래에 문화재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면 집 전체를 헐어야 하는 상황도 맞을 수 있다. 그래서 박씨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땅만 파면 유물이 나오는 천년고도(千年古都) 경주의 시민들이 문화재 보호만을 강조하는 각종 규제로 고통받고 있다. '그린벨트(green belt)'에 비견되는 '컬처벨트(culture belt)'로 인한 생활 피해인 셈이다. 외동읍 토박이 우종철(46·법무사)씨는 "문화재보호법이 경주를 박제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경주 시내 면적의 10%(1067만8000여평)가 '문화재 지정·보호구역'으로, 건물의 증·개·신축 등 각종 개발행위가 금지되고 있다. 여기에 문화재 지정·보호구역 주변 200~500m 이내 지역이 고도(高度)와 건축양식 등의 제한을 받는다. 경주 인구 28만명 중 성동동을 비롯, 성건·중앙·황오·인왕동 등 시내 모든 주택가(주민 13만명)가 여기에 포함된다. 건물 증·개·신축시 반드시 시청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2층이나 기와를 얹지 않는 건축물 등은 원칙적으로 짓지 못한다.
뿐만 아니다. 문화재 지정·보호구역과 그 주변지역은 물론, 시청 문화재영향검토위원회가 '매장(埋葬)문화재발굴이 예상되는 지역'으로 판단하는 곳이면 무조건 시굴을 해야 한다. 시굴 도중 문화재가 발견될 징후가 나타날 경우 공사는 중단되고 즉시 발굴작업이 시작된다.
20일 오후 경주시 성동동 273의 1. 벌겋게 속살을 드러낸 890평의 흙바닥 공터 주위로 흰색 비닐 띠가 둘러져 있다. 서울에서 포항으로 내려온 신남진(63)씨가 횟집을 열기 위해 지난해 11월 사들인 땅이다. 그러나 지난 20일 시굴에서 신라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도자기 파편과 기왓장이 나왔다. 기존 건물만 헐어놓고 4개월 동안 시굴 순서를 기다려온 공사는 그 즉시 '올스톱'. 이제 신씨는 8700만원의 발굴비를 내고 발굴작업이 끝나는 연말까지 4~5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평당 1만원씩 890만원의 시굴비용도 이미 신씨가 지급했다. 신씨는 "이자·출장비 등 수천만원 손해에 이제 나는 망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로·하수도 공사도 마찬가지. 이 때문에 수십년된 낡은 하수관으로 인해 비만 오면 집안에 물이 차는 집도 적지 않다. 황오동 주민 김용대(56)씨는 "비 오면 천장과 바닥 양쪽에서 물이 찔끔찔끔 새어나와 이웃집으로 대피해야 한다"고 한숨지었다.
현재 경주에서는 현곡면 금장리 청령~현곡 간 지방도로 공사장, 북문로 공사장 등 10여곳도 유물 발굴로 공사가 지연되고 있다. 지난해 8월에는 현곡면 433의 2 공동주택 건설지역에서 6세기 경작 유구가 나와 공사가 속속 중단됐었다.
경주 경실련 안상은 사무국장은 "주민의 고통을 발판삼아 세계적인 역사도시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부터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동국대 조경학과 강태호 교수는 "문화재와 주민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을 터야 경주가 역사문화도시의 위상을 이어갈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