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김대승 감독이다. 4일 개봉된 영화 '혈의 누'(제작 좋은영화사). 4년여만의 컴백작인데, 관객과 평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웰메이드 잔혹 스릴러답게 화면이 꽉 차있다. 사극과 스릴러라는, 충돌하기 쉬운 두 형식을 슬기롭게 엮어낸 내공이 만만치 않다. 섬세한 손길로 환생과 동성애라는 코드를 버무려냈던 데뷔작 '번지점프를 하다'와는 180도 다르다. 흥행 성적도 훌륭하다. 개봉 4일만에 100만 관객을 훌쩍 넘겼다. 19세기 조선의 외딴 섬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사건을 그린 '혈의 누'로 관객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준 김대승 감독을 만났다.

-반응이 좋은데.

▶사실 기자 시사회 직후부터 개봉 전날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번지점프를 하다'의 개봉때도 '이 영화가 내 인생의 마지막 작품이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절박했는데, 이번에도 만만치 않았다.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멍하게, 아주 지루한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개봉을 기다렸다.

-스릴러적 쾌감에 매달리지 않았는데.

▶사람을 처참하게 죽이는데 목적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스릴러란 장르는 메시지를 운반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1년여동안 시나리오 각색을 했다.

▶기본 신분 질서가 무너지면서 가치 충돌이 본격화되는 19세기를 무대로, '염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탐욕이라는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극악해질 수도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영화는 양심에 대한 고찰이고, 결과적으로 인간 탐구다. 처음 시나리오는 암행어사가 사건을 해결한다는 전형적인 스릴러였는데, 이 메시지를 전달하기 좋은 구조로 각색했다.

-비주얼이 꽤 세다. 특히 5일에 걸쳐 벌어지는 다섯가지 방법의 살해 장면의 정교함에 감탄했다. 그런데 그 닭 죽이는 장면에서 꼭 그렇게 클로즈업을 해야했나.

▶겹겹이 모든 가치가 충돌하는, 아주 중요한 신이다. 과학과 무속.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충돌을 보여주기 위해 리얼하게 표현한 것이다. 디테일에 있어 최선을 다했는데, 나무에 꽂힌 채 죽은 시신 한 구 만드는 데 수천만원이 들었다. CG만 100장면 이상 작업했다. 우리 영화의 미덕이 있다면 반은 민언옥 미술 감독 덕분이고, 나머지 반은 차승원씨 때문이다.

-주연 배우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한때 충무로에 불화설이 돌기도 했다.

▶첫 촬영때부터 부딪혔다. "컷, 아니 그 동작 하지 마세요. 왜 자꾸 그러는 거예요"라고 외쳤으니, 분위기가 당연히 싸늘해졌지. 그 다음 여수 세트 오픈식때 기념 사진을 찍었는데, 지금 그 사진을 다시 봐도 정말 웃긴다.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며 인사 한번 제대로 안했다. 그 다음 촬영때 승원씨가 맥주 한잔 하자고 하더라. 승원씨는 맥주를,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길 시작했는데, 둘이 할 말, 안 할 말 다했다. 승원씨로부터 "감독님, 독선은 집에 가서나 부리시죠"란 말을 들었고, 나 또한 생채기를 낼 만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누가 이긴건가.

▶내가 졌다. 어느날 밤 내 방에 찾아온 승원씨가 자신이 생각하는 '원규'의 모든 것을 4시간에 걸쳐 풀어놓더라. 여관방 초라한 티테이블에서 시나리오를 줄줄이 읊어가면서, "이 장면에서 원규 심정이 이러지 않았겠어요"라고 분석을 하다가 벌떡 일어나서 연기를 해보고, 승원씨 열정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 그 다음부터는 현장에 도착하면 승원씨부터 찾게 되더라. 일단 죽을 고생을 같이 할 동료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답답한 일이 생길 때마다 자기가 갈 길을 정확히 아는 그에게 물어보고 싶어질 정도였다.

-세 배우에 대해 평가한다면.

▶승원씨는 디테일이 강한 배우다. 우리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승원씨의 손 연기를 봐라. 그건 연기가 아니라, 극중 캐릭터에 빠져버린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건데. 카메라에 잡힌 승원씨의 손(감독은 양심을 버린 자의 부끄러운 손이라 표현했다)을 보고 감동했다. 박용우씨나 지성씨 모두 최선을 다했다. 내가 배우 복이 참 많은 사람이다.

-임권택 감독님 밑에서 오래 조감독을 했는데.

▶'서편제'부터 '춘향뎐'까지 8년동안 감독님 밑에서 일을 배웠다. '번지점프를 하다'때도 많이 혼났는데, 이번에도 30분간 꾸중을 들었다. 시사회 끝나자마자 주차장까지 쫓아갔다가, 된통 혼나고 기자회견장에 돌아오는데 정말 괴롭더라. 사람들은 계속 인사를 하지, 기자회견에서도 의연한 척 해야지. 뭐 때문에 혼났냐구? 아하. 맑은 정신엔 말하기 힘들다. 지금도 그 날카로운 지적 앞에서 너무 부끄럽다.

-차기작은.

▶'가을로'란 멜로 영화다. 오래 전에 연출 이야기가 오고갔던 작품으로, 연이 닿아 이번에 메가폰을 잡게 됐다. 상반기 중에 크랭크 인할 예정이다.

(스포츠조선 전상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