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신 다음날, 설렁탕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실 깍두기를 더 좋아합니다. 설렁탕에 깍두기 국물을 타먹는 사람을 보면 대번에 그 사람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저는 가끔 깍두기였거든요.
제가 자라난 시골 마을에서 꼬마들은 무조건 모여 놀았습니다. 농사일이 바쁠 때는 모를까, 집에 있어봤자 심심하기만 했죠. 게임기도 컴퓨터도, 없거나 흔치 않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큰 마을은 아니었지만 또래들이 다 모이면 그래도 그 수가 만만치 않았기에 놀 때는 편을 가르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편을 짤 때는 종종 문제가 생기곤 했습니다. 인원이 여덟이나 열이면 깔끔하게 나뉘어지련만, 일곱이나 아홉이 되면 꼭 하나가 남았으니까요.
살구꽃 지고 복사꽃 피던 어느 날, 동네 공터에 우리 아홉이 모였습니다. 우리는 말뚝 박기를 하기로 했고, 열두 살 열세 살이었던 두식 형과 성칠 형이 각각 대장이 되어, 편을 짜기로 합니다. 말뚝박기는 큰 덩치가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두식 형과 성칠 형은, 가위 바위 보를 반복하며, 덩치가 큰 용철이, 근대, 민석이, 영수 순으로 아이들을 하나씩 뽑아갑니다. 나는 내심 내 이름이 불렸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래도 내색은 하지 않은 채 신발로 흙을 파며 기다립니다.
하지만 남아 있는 병호, 윤식이, 용훈이, 철희가 뽑혀가도록 내 이름은 불리지 않습니다. 하나 남은 나는 깍두기가 됩니다. 그래서 슬펐냐고요? 아닙니다. 서운한 감은 있었지만, 깍두기는 꼭 그렇게 슬픈 위치는 아니었으니까요. 나는 두식 형 편이 공격을 할 때는 전날 발목을 접질린 윤식이를 대신해 말 역할을 합니다. 덩치는 작아도 몸 하나는 단단했던 나는, 엉덩이가 함지박만한 윤식이의 공격을 잘 막아냄으로써 박수를 받는 깍두기가 되었지요.
성칠 형 편이 공격을 할 때는 또 어땠고요. 저는 가장 부실해 뵈는 철희 등 위에 날렵하게 다람쥐처럼 날아올라, 철희를 쓰러뜨리고, 성칠 형 편이 공격에 성공할 수 있는 결정적 수훈을 세웠습니다. 돌아가는 길엔 기분이 좋아 바닥에 놓여 있는 차돌을 뻥뻥 차며 걸어갔습니다.
깍두기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덩치가 작아서, 어려서, 팀을 다 짠 후에 도착해서 등 여러 이유로 정식으로 어느 편에 속할 순 없었지만, 완전히 버려지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심지어는 양쪽 어느 편이 승리를 해도 같이 기뻐할 수 있는 특권 같은 것을 가진 존재였다는 말입니다.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한동안 고민 상담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서도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고민은 빠지지 않더군요. 코스모스 꽃잎처럼 얇고 여린, 어린 소녀의 입에서 "죽고 싶다"는 표현까지 나오는 것을 들으며, 마음이 어찌나 아팠던지요. 그날 집에 돌아와 라면을 올려놓고 냉장고 문을 열다가, 저는 문득 깍두기가 얼마나 다정한가를 생각했습니다. 우리와 달라서, 우리보다 약해서, 우리보다 못나서, 우리보다 늦게 도착해서, 우리 편에 완전히 속하기에 모자람이 있다면, 그 아이를 깍두기로 삼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동치미를 담고 남은 무 조각을 배추김치 사이에 끼워 넣듯 말입니다.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일본의 혼슈(本州)는 우리 땅이 아니지요. 깍두기는 우리 아이들의 풍습입니다. 왕따는 우리 아이들의 풍습이 아닙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의 교실에 왕따 대신 깍두기가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김제동 ·방송인 ·학교폭력예방 홍보대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