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강좌는 다른 이론수업과는 달리 ‘음(音)’을 직접 체험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학생들은 학교측에서 마련한 피아노 4대를 망가질 때까지 이리 뜯고, 저리 뜯는다. 강사인 정씨는 피아노 안에서 소리를 만드는 해머를 깎아서 음색이 변하는 것을 학생들에게 보여준다. 어려서부터 연주만 해오던 음대생들은 자신이 다루는 악기의 실체를 비로소 알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1998년 1학기 첫 강의 이후, 그는 1년 만에 같은 과목을 세 강좌로 늘렸다. 컴퓨터공학과, 법학과 학생들까지 입소문을 듣고 몰려들어 막상 음대생이 수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가 악기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전남 목포고 재학 시절, 교내 현악부에 가입하면서부터다. 악기들이 도대체 어떤 조각들로 만들어져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지 파헤쳐 보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도 전남대 음악교육과로 갔다.
“연주자는 소리가 제조되는 과정에는 미처 신경을 못 쓰고, 기술자들은 대개 악기 안에만 머무르죠. 저는 둘 사이에 다리 노릇을 하고 싶었어요. 우선 피아노를 정복해 보기로 했어요. 피아노는 부품들로 꽉 차 있거든요. 복잡하니까 공학적으로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죠.”
조율사 정씨의 이력(履歷)은 특이하다. 1991년 독일에서 ‘클라비어바우어(klavierbauer)’라는 국가 공인 자격증을 땄다. 이 긴 이름의 자격증은 피아노 조율과 음향학, 재료학 등 피아노에 관련된 모든 이론·실습 시험을 통과해야 주어진다. 1985년 피아노 조율사가 되기 위해 독일로 날아간 지 6년 만에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요리하게 된 것. 그동안 그의 열 손가락은 항상 피가 맺혀 있었다.
정씨의 재능 때문에 독일 체류 기간 동안 생긴 에피소드도 있다. 유럽의 명문 음대인 ‘쾰른’에서 1년간 무보수 견습생으로 공부하려던 정씨는 6개월 만에 대학 정식직원으로 채용됐다. 제아무리 삐걱거리는 피아노라도 그의 손길이 닿으면 대번에 낭랑한 제 소리를 찾으니 쾰른 음대도 이 작은 동양인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학생 비자를 갖고 돈을 버는 바람에 불법체류자로 찍혀, 강제추방 당할 뻔했다. 다행히 교수들이 적극적으로 구명(救命) 운동을 펼쳐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그는 “그때 고생하며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피아노의 전부를 알려주고 싶다. 부품 하나가 떨려 소리가 되고, 귀까지 옮겨가는 과정을 모두…”라고 했다.
그는 본업이 기술자인 만큼 강의만 하는 것은 아니다. 국내 유명한 연주홀의 피아노들이 정씨의 손길을 찾는다. 정씨는 1997년부터 4년간 예술의 전당 피아노를 관리했고, 2001년 금호아트홀이 개관한 이후, 이곳 피아노의 주치의 노릇을 하고 있다. 클래식 애호가로 정평이 난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성용(73) 명예회장 자택의 연주홀도 그의 손길이 닿는다.
정씨는 “연주자들은 제가 만진 피아노가 ‘본토에서 듣던 음’을 낸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며 웃었다. 그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피아노에 이어 바이올린 정복이 그의 다음 목표라고 한다. 정씨는 “바이올린은 피아노보다 구조적으로 훨씬 복잡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악기”라면서 “하지만 이 녀석도 피아노처럼 음 하나까지 다 파헤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