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99년 전인 1906년, 당시 심흥택(沈興澤) 울릉군 군수가 '독도가 일본 영토로 편입됐다'는 억지 논리를 펴던 일본 관리들에 맞서 대형 태극기를 내걸고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또 심 군수는 울릉도에서 마구 나무를 베어가던 일본인들의 철수를 중앙정부에 요청하며 울릉도·독도지키기에 나선 것으로 드러났다.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태 연구관은 8일,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의 영토로 편입한 뒤 독도조사단 명목으로 울릉도에 들렀던 오쿠하라 후쿠이치(奧原福市·초등학교 교장)씨가 1907년 독도 보고서로 펴낸 '죽도(竹島·독도의 일본 명칭)와 울릉도'와 시마네현 지방신문인 '산인(山陰)신문'의 당시 조사단 기행문 등에서 심 군수의 행적을 찾아내 공개했다.

<b>99년전 울릉도 군청 앞에 선 한·일<

산인신문에 따르면, 1906년 3월 28일 일본 시마네현의 진자이(神西) 사무관 등 독도 조사단 10여명은 울릉도 관아(군청)로 심 군수(당시 52세)를 방문, "당신 섬(울릉도)과 우리가 관할하고 있는 죽도(독도)는 가까이 있다. 또 당신 섬에는 우리나라(일본) 사람들이 많이 체류하고 있으니 잘 돌보아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심 군수는 독도를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한 일본 관리들의 말에 깜짝 놀라, 기념 사진을 찍자는 일본 관리들의 제안에 일부러 어린아이들에게 대형 태극기를 자신의 옆에서 들도록 한 뒤 사진을 찍었다는 것. 그리고 이튿날 중앙정부에 '본군(本郡) 소속 독도에 대해 일본 관원 일행이 찾아와 독도가 일본의 땅이 됐으므로 시찰차 왔다고 말했다'는 긴급 보고를 올렸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심 군수에 대해 "응대하는 태도가 세련됐으나 '행정상 질문'에 대해서는 '요령부득(要領不得)'이었다"고 '죽도와 울릉도' 책에 기록됐다.

이 연구관은 "독도가 일본 영토로 됐다는 일본측 주장을 심 군수가 받아들이지 않자, 일본인들은 이를 '요령부득(중요한 부분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라며 "당시 울릉도 관아에 태극기가 걸려 있는데도 또 다른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은 것은 일본인들에게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히려는 의도였다"고 밝혔다.

이 같은 심 군수의 긴급 보고로 중앙정부에선 일본인들의 동태를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가고, 당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문 등에서 이에 항의하는 기사가 대대적으로 실렸다.

그러나 일본은 광복 이후 우리와 독도 영유권 논쟁을 벌이면서 1954년 2월 우리 정부에 보낸 구술서(口述書·외교 문서)에서 "만일 당시 울릉도 군수가 독도를 울릉도에 속했다고 간주했다면 가이니시 일행을 후대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오히려 심 군수의 역할을 왜곡했었다.

이 연구관은 "심 군수가 보고서에 독도를 '본군 소속'이라고 명기한 것은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밝힌 우리 역사상 가장 중요한 보고였다"고 평가했다.

1855년 서울에서 태어난 심 군수는 대한제국의 신진 관료로, 1897년 독립협회 창립 때 후원금을 내는 등 깊숙이 관여했다. 또 그의 가족들이 1900년부터 이승만·이준 등 독립운동가들을 대거 배출한 서울 상동교회에 다닌 점으로 미뤄 그의 독립·배일(排日)정신은 뿌리깊은 것으로 보인다고 이 연구관은 말했다. 1903년부터 3년여간 울릉도 군수로 있을 때 순경 4명을 주둔시킨 뒤 울릉도의 나무들을 마구 베어가던 일본인들에 대해 퇴거령을 내리기도 했다.

심 군수의 증손자인 재헌(49·학운 초등학교 교사)씨는 "증조할아버지는 울릉 군수에 이어 강원 횡성군수로 있다가 1911년 일제에 의해 면직됐다"며 "지금은 강원도 원주의 야산에 묻혀 있지만 독도와 울릉도를 지킨 수호신이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