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0월 8일 오후 4시 휘문고보 운동장(현재 서울 계동). 낮 12시부터 관중이 몰려들어 경기장은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킥오프 휘슬이 울렸다. 한국 축구의 모태인 경평전(京平戰)이 처음 열리는 순간이었다.
조선일보가 주최하고 조선체육회가 후원한 이 대회의 공식 명칭은 전평양 대 전경성의 제1회 축구대항전이었다. 대회는 8일에 개막해 사흘간 잇달아 벌어졌다. 조선일보는 ‘만원이 되면 입장을 사절할 경우도 있겠음으로 일반은 될 수 있는 대로 정각 이전에 내참하라’고 안내했다.
10일 경기에 앞서 조선일보 안재홍 부사장은 “조선의 양대 도회인 평양과 경성 두 도시의 친목을 위하여 실로 축복하여 마지 않는다”고 개막식 축사를 했다. 조선일보는 경평전 당일 사설을 통해 ‘우리 모두 부지중에 일체가 되어 민족적 차원에서 화합하자’고 강조했다. 축구를 통해 전 민중을 단합시키고, 청년들에게 민족정기를 함양시키겠다는 취지였다.
경평전의 인기는 평양에서도 하늘을 찔렀다. 가게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평양 기생들은 영업을 하지 않았다. 또한 서울에서 경기가 열릴 때에는 서울까지 3시간 걸리는 기차에 설 자리도 없었다고 한다.
경평전은 1929년과 30년 조선일보 주최로 열린 뒤 33년부터는 조선축구협회의 주도로 2년간 더 계속됐다. 조선일보는 38년 4월 제 1회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를 주최해 그 맥을 이어갔다. 이 대회에는 사상 처음으로 조선 12개 도시 축구팀이 참여하는 성황을 이뤘다. 조선일보는 이 대회를 ‘스포츠 조선의 획기적 거사’로 명명하고, 특대호를 발행하고 우승팀 알아맞추기 응모대회를 여는 등 성황리에 진행했다. 경평전은 1946년 3월 마지막으로 열렸으며, 지난 90년 ‘남북통일축구’라는 이름으로 서울과 평양에서 한 차례씩 경기를 갖는 등 일시 부활한 바 있다.
조선일보는 1946년부터 전국 중고축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해 미래의 꿈나무들을 길렀다. 올해 60회째를 맞는 이 대회를 통해 이회택과 차범근, 최순호, 김주성, 황선홍, 이천수 등 한국 축구의 스타들이 꿈을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