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자본 떠난 뒤 폐허로 게릴라 막으려 군대상주
마을엔 '노벨의 땅' 표지 生家는 작품에 고스란히
체국도 가게 이름도 모두 '마콘도'로 지어
카리브해 파도는 수십억년 동안 남미 대륙의 이마를 핥았다. 폭우와 무더위가 번갈아 내습하는
그 대륙을 달군 햇볕은 켜켜이 쌓인 시간의 고독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백년의 고독'에서 중남미의 고단한 현실과 환상을 교직해낸 무대는 그렇게 누워 있었다.
소설은 열대림 속 '마콘도(Macondo)'라는 상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시간의 도저한 수레바퀴 속에서 소멸해가는 부엔디아 가문의 운명을 그렸다. 마콘도는 전설과 신화가 살아있는 환상의 공간이면서 남미 현대사의 상징적인 무대다.
콜롬비아 북서부에 있는 카리브해 관광도시 카르타헤나에서 비행기를 내려 마콘도의 무대인 아라카타카를 향해 250여㎞를 달렸다. 작가는 아라카타카에서 태어나 8세까지 살았다. 카리브 해안을 따라 썩은 고목이 널려 있고 탁하고 검은 진흙탕으로 이루어진 광활한 늪지가 펼쳐졌다.
아라카타카는 "마약 재배지를 근거지로 삼은 반정부 게릴라들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 외지인들이 출입을 꺼리는 오지(奧地)"(운전사 엔리케씨)이다.
과연 무장 군인과 장갑차가 수시로 순찰을 돌았다. 하지만 일상은 어디에도 있었다. 이곳에서 간식으로 애용되는, 메추리알의 절반 크기인 삶은 이구아나알을 줄에 꿰어 코카콜라와 같이 파는 장사꾼들이 교차로마다 눈에 띄었고, 맨발의 메스티소(백인과 인디오의 혼혈) 소년이 노새에 매단 마차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아라카타카에는 '노벨의 땅'이란 표지가 붙어 있었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 현실과 향수(鄕愁) 사이에서 내 작품의 원재료를 발견했다"는 작가의 말이 쓰인 대형 표지판이 마을 입구에서 손님을 맞았다. 주민들은 "가보(Gabo·작가의 이름인 '가브리엘'의 애칭)는 우리의 자랑"이라며 "우체국도, 가게 이름도 모두 마콘도라고 짓는다"고 했다. 에밀리아노 알바레스씨는 "미국인 소유의 바나나 농장이 한창 번성할 때는 돈 뭉치에 불을 붙여 횃불을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였는데, 미국 자본이 나가면서 폐허같이 되어 버렸다"고 말했다.
작가의 생가(生家)는 원래 양철 지붕을 씌운 목조 건물 3채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식당·부엌·창고가 있던 건물만 한 채 남아 있다. 그동안 두 번 주인이 바뀌었고, 1982년 '백년의 고독'이 노벨상을 수상하자 정부에서 구입해 관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가보를 키운 것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다. 외할머니는 귀신 이야기로 어린 가보를 전율에 떨게 했고, 외할아버지는 그를 서커스에 데려가고 끊임없이 시민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시절 듣고 겪은 이야기들―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신화적인 사건들은 고스란히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뇌세포에 새겨졌고, '백년의 고독'에 녹아들었다.
보고타에서 만난 작가의 사촌 동생 오스칼 알라르콘씨는 "양탄자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가 하면 4년 11개월 이틀 동안 계속되는 비같이 환상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풀어내는 서술 방식은 이러한 성장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이라고 덧붙였다.
어린 가보가 지켜보는 가운데 외할아버지가 작은 황금 물고기를 만들어 미세한 에메랄드 눈을 붙이면서 시간을 보내던 귀금속 세공실이 있던 방은 50여년 전에 불타버렸다. 그러나 황금 물고기 이야기는 소설로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전쟁에서 돌아온 아우렐리아노 대령은 고독을 견디기 위해 황금 물고기를 녹여 다시 황금 물고기를 만드는 일을 죽을 때까지 반복한다. 수십개의 요강을 넣어놓은 창고와 대령을 묶어 놓았던 큰 나무 역시, 그의 집 뒷마당에 있던 나무가 형상화된 것이다.
생가를 안내한 라파엘 다리오 히메네스씨는 "깊은 고독 속에서 권총 자살한 아들이 흘린 피가 부엌과 방 밑, 마당을 돌아 어머니에게 도달하는 장면은 이 집 구조에서 그대로 따왔다"고 말했다.
자유당과 보수당의 갈등으로 1000일 전쟁이 벌어지고, 미국 바나나 회사에 맞서 파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무려 3000명이 넘는 주민들이 학살된다는 엄청난 이야기가 사실과 환상이 교차되는 공간에서 전개된다. 작품의 무대인 아라카타카에는 철수한 미국인 바나나농장 사무실의 양철 지붕이 녹으로 내려앉았으며, 이곳으로 향하는 도로 양옆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바나나농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 혼돈의 역사는 196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한 좌익 반군과의 내전으로 오늘날까지 반복되고 있었다. '마콘도=아라카타카'는 그 상징적 현장이었으며,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는 끝없이 반복되는 하나의 톱니바퀴였다. 소설 속 그 100년의 시공간은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뛰어넘어 지금도 살아있었다.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한낮의 햇볕에 달궈진 먼지와 더위 때문에 숨쉬기조차 힘든 아라카타카 거리는 점차 고독과 망각의 공간으로 변해가는 듯했다. 야자나무 잎으로 지붕을 엮은 집 앞에 안락 의자를 내다 놓은 사람들은 망연히 앞을 응시하거나, 해먹에 드러누워 더위를 견디고 있었다.
남미 대륙을 숨가쁘게 거슬러 올라온 안데스 산맥의 북쪽 끝 봉우리인 시에라 네바다에서 발원한다는 개천으로 새까맣게 그을린 아이들이 개천으로 뛰어들었다. 운전수 엔리케씨는 "(게릴라들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어두워지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자"고 서둘렀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노벨문학상 시상식장에서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 제국주의의 침탈, 그리고 독재자들의 철권통치를 겪어야만 했던 남미인들의 '고독'을 전 세계에 호소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억압과 약탈과 절망에 맞선 우리의 대답은 삶이란 것"이라고도 했다.
문학평론가 이그나시오 라미레스씨는 "작가는 현실과 상상이 섞인 언어를 구성해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었다"며 "마콘도에서 일어나는 과장되고 기상천외한 일들은 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미대륙의 고독을 벗어나기 위한 지난한 여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