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대승불교의 최고 경전이라고 일컬어지는 화엄경. 화엄경에서는 네 종류의 '법계(法界)'를 이야기한다.

법계는 보통 '깨달음의 차원'으로 해석한다. 첫째는 이무애(理無碍)의 법계이다. 형이상학적인 이치에 걸림이 없는 단계이다. 둘째는 사무애(事無碍)이다. 현실의 일처리에 걸림이 없는 단계이다. 셋째는 이사무애(理事無碍)이다. 형이상학적인 이치뿐만 아니라 현실의 일처리에도 아울러 통달한 경지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넷째 단계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이다. 일과 일에 걸림이 없는 단계를 가리킨다. 최고의 경지는 사사무애이다. 이러한 네 단계의 차원을 공부하면서 드는 의문은 ‘사사무애’란 과연 어떤 경지인가 하는 것이다. 하늘의 이치와 땅의 일에 모두 걸림이 없는 이사무애의 경지에 이르면 공부는 사실상 끝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무애를 또다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과 일에 걸림이 없다’는 말은 도대체 어떤 의미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근래에 ‘요한복음’ 8장을 읽으면서 내 나름대로 사사무애를 이해하게 되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에게 물었다.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자는 돌로 치라고 되어 있으니 당연히 돌로 쳐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예수 입장에서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 여자를 살려주자니 율법에 위반이 되고, 그렇다고 돌로 치자니 한 생명을 죽이는 행위가 되는 상황이다. 어느 쪽이든지 한쪽은 걸리게 되어 있었다. 장기로 비유하면 외통수의 상황이라고나 할까.

이때 예수가 내린 판단이 그 유명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판단이 바로 사사무애의 전형이 아닌가 싶다. 일과 일에 걸림이 없다는 것은, 현실의 모순되는 상황에서 양쪽에 걸림이 없이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는 일이다.

말이 그렇지 이러한 지혜를 갖기는 정말 어렵다. 예수도 이 메시지를 전할 때 말로 직접 하지 않았음을 주목해야 한다.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썼다'고 되어 있다. 예수도 어떻게 판단을 해야 할 것인가 하고 고민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모순되는 대립이 넘치는 상황을 겪으면서 사사무애와 예수의 판단이 생각난다.

(조용헌 goat135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