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임시정부를 조직할 당시 소수인의 천행(擅行)으로… 노령에 있는 대한국민의회는 임시정부와 통일을 제창하였으나 파열로 돌아갔고, 서·북간도는 참화(1920년의 간도참변) 이래 차원(嗟怨)의 소리를 발하고 있다… 북경 방면의 인사는 분열을 통탄하고 통일을 촉진하는 단체를 출현시키고 상해 인사는 개혁의 의(議)를 창도하고 있다… 근본적 대개혁으로서 통일적 재조를 꾀하여 독립운동의 신국면을 타개하려고 함에는 민의뿐이므로 노력 분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제창한다.”(‘아 동포에게 고함’·1921년 2월)
1921년의 상해의 독립운동계는 벽두부터 소란스러웠다. 이 선언은 임정의 무능을 비판하고 분열을 종식시키고자 제안된 것인데, 이승만 대통령의 상해 체류 중에 발표되어 그에 대한 비판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더욱이 이 선언은 임정의 주요 지지기반이었던 서간도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충격이 컸다.
회의장 주변엔 개조파와 창조파가 분쟁 끝에
살상을 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각 단체 대표 125명이 5개월간 논쟁했지만 독립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을
구성한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앞서 한인사회당(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지도자이자 임정 국무총리였던 이동휘는 1921년 1월 이승만도 참석한 국무회의에서 “내각책임제 성격의 국무위원제를 채택하고 국무위원회의 공결(公決)로 행정하자”는 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안창호를 포함한 국무위원 다수는 이동휘의 제안에 반대하고 대통령제를 유지할 것을 결의했다. 1월 24일 이동휘는 국무회의를 성토하며 임시정부에서 탈퇴했다.
그의 탈퇴는 1년여에 걸쳐 유지되어 온 통합 임시정부의 붕괴를 의미했다. 그의 사퇴 후 고민을 거듭하던 안창호도 1921년 5월 6일 서간도의 김동삼 등이 이승만의 퇴거와 임시정부의 개조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자 이를 지지하며 임시정부를 떠났다. 이들은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함께 ‘개조파’를 구성했다.
한편 1920년 2월 재건을 선언한 노령의 국민의회는 4월 일본군의 연해주 출병을 피해 아무르주로 근거지를 옮기고 바이칼호 서쪽의 전로(全露)고려공산단체와 결합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을 형성했다. 새 보금자리를 차린 국민의회 그룹은 하와이에서부터 이승만과 반목하던 박용만, 임정의 외교노선을 비판하던 신숙과 신채호 등 북경세력과 제휴하여 북경군사통일회의를 구성해 ‘창조파’ 연합 조직을 출범시켰다.
1921년 4월 17일 군사통일회는 “독립 문제는 군사가 아니면 해결이 불능이요, 군사운동은 통일이 아니면 성공은 난망이라”면서 독립운동의 방략을 무장투쟁론으로 명확히 했다. 이들은 목적을 달성하고자 상해 임정과 의정원을 즉각 해체하고 1919년 4월 23일 국내에서 선포된 한성정부의 법통인 ‘대조선공화국’을 건설,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받들어 군사통일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선(戰線)이 형성되면서 양 진영의 발걸음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안창호는 임시정부를 탈퇴한 다음날부터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위한 전도사로 나섰다. 대회 경비는 이동휘가 모스크바에 파견했던 한형권이 20만달러를 가져와 해결되었다. 1923년 1월 3일 개회된 국민대표회의에는 135개의 단체가 참가했고, 158명의 대표가 파견됐으며, 이 중에서 자격심사를 거쳐 최종적으로 125명이 대표로 최종 확정됐다. 그리고 의장 김동삼, 부의장 윤해·안창호, 비서장 배천택, 비서 김철수·오창환·박완삼이 선출됐다.
회의에서는 처음 상해파의 참여를 저지하고 극동민족대회를 주도한 뒤 상해에 먼저 도착한 이르쿠츠크파가 이니셔티브를 잡았다. 이들은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의 고려공산당 통합 대회에 참석했던 상해파와 장덕수 등 상해파 국내대표단의 참석이 늦어지면서 대회가 연기되자 상해파가 국민대표회의에 대한 지연 전술을 펴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양 공산당이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리전을 펴는 형국이었다.
개조파는 곧 반격에 나섰다. 이들은 기존 정부를 계승할 테니 의정원은 자진 해산하고 모든 것을 국민대표회의에 일임하라면서 임정 고수파까지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러나 하와이에 체류 중인 이승만의 의중이 전해지면서, 의정원 결의로 정부 개조를 도모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사태를 낙관하던 이승만이 돌연 태도를 바꾸어 국민대표회의에 대한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일시 수세에 몰렸던 창조파도 적극 대응에 나섰다. 코르뷰로의 소환령으로 장건상과 이진이 회의장을 떠나자 주도권을 쥔 국민의회그룹은 새 정부의 ‘신직원’으로 기용될 명단을 유포시키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김동삼·이청천·윤해·원세훈·한형권 등의 이름이 상해뿐만 아니라 국내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양측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상해에는 삼엄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국민의회 지도자 문창범은 니콜리스크에서 군인구락부 이청천 앞으로 1000원을 송금하면서 최후까지 주장을 관철해달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북경 쪽에서도 ‘건장한 청년들’을 상해로 보내 창조파의 활동을 지원하라고 독려했다. 회의장 주변에는 개조파와 창조파가 분쟁 끝에 살상을 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결국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와 창조파가 합의하여 독립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을 구성한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1923년 5월 말 개조파가 회의장을 박차고 나간 뒤, 창조파가 조직한 국민위원회라는 새 정부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련에 의해 거부되었다.
국민대표회의는 전체 독립운동 진영에 큰 관심과 기대를 불러일으킨 대사건이었다. 임시정부 운영에 대한 진지한 숙의 속에서 독립운동 전략에 대한 백가쟁명의 논쟁이 펼쳐졌으며 독립운동이 좌·우로 분화되는 초기에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을 촉진시켰다. 상해파가 몰락하고 이르쿠츠크파가 부상하는 등 참여했던 세력들의 명암이 갈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국민대표회의는 또 회오리의 한복판에 섰던 임시정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뒤 이승만·이동휘·안창호 등 초기 임시정부를 삼분하던 정치적 거두들의 퇴진으로 무주공산이 된 임시정부는 김구 등 이론보다는 투쟁으로 임시정부를 지킬 인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현주 국가보훈처 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