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1919년 8월 워싱턴DC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하고 선전 활동에 주력했다. 그 방법은 대중집회와 강연활동, 각종 홍보물 배포, '한국친우회'의 결성 등이었다. 강연 활동에는 이승만·서재필·정한경과 한국에서 선교 활동에 종사한 바 있던 헐버트·벡 등이 나섰다. 홍보물은 '한국적요(韓國摘要)' 등 30~40종에 달했다. 한국친우회는 미국 내 21개 도시와 런던·파리로 확대되어 나갔다. 그들은 2만5000명의 회원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구미위원부는 미국 내에 친한(親韓) 여론을 조성함으로써 의회를 움직이고, 이를 바탕으로 윌슨 행정부의 대외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다.
이승만과 구미위원부는 1921년 11월에 개최된 워싱턴회의(일명 태평양회의 또는 태평양군축회의)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 이 회의에는 일본·영국·프랑스·이탈리아·중국 등 9개국 대표단이 참석했다. 워싱턴회의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의 현안 문제들에 대하여 논의하기로 되어 있었다.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워싱턴회의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임정은 이승만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이승만은 '한국대표단'을 구성하고 워싱턴회의에 한국 문제를 상정하기 위하여 총력 외교를 펼쳤다. 미국 각처의 한국친우회도 한국대표단을 측면지원했다.
하지만 워싱턴회의의 주최국인 미국은 한국대표단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아가 미국은 일본과 새로운 협력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소위 워싱턴 체제를 출범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3·1운동 이후 지속되어 온 한국민의 미국에 대한 기대는 실망과 좌절감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임정 내에서 이승만의 입지가 흔들리고 구미위원부는 장기간의 침체에 빠지고 말았다.
입력 2005.01.1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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