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1986년 사이 대법원장을 지낸 유태흥 전 대법원장은 1차, 2차 사법 파동의 주인공으로 파란만장한 판사생활을 보냈다. 1차 사법파동은 1971년 7월 서울지검 공안부가 반공법 위반사건의 증인 신문을 위해 제주도에 출장간 판사 3명이 변호인측으로부터 여비 및 숙박비 등을 받았다며 이들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데서 촉발됐다. 유태흥 당시 서울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는 이들에 대한 영장을 기각했고, 이후 서울지법 법관 83명은 “검찰의 영장 청구는 법원이 시국사건에서 잇따라 무죄를 선고한 데 대한 보복 조치”라며 사법권 수호 결의문을 발표하면서 일제히 항의 사표를 제출했다. 이후 사태는 전국으로 확산돼 전체 법관 455명 중 150명의 판사들이 사표를 내는 사법 사상 초유의 사태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이어 그는 대법원장 시절인 1985년 법관 인사파동(2차 사법 파동)으로 국회에서 사법 사상 처음으로 야당으로부터 탄핵 소추를 당하는 불명예를 맞았다. 당시 인사 파동은 법관 인사의 난맥상을 비판하는 글을 한 법조신문에 기고한 판사를 좌천시켰다가 판사들의 집단 반발을 산 데서 비롯됐다.

그는 1919년 11월 28일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1937년 경복고를 졸업한 뒤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간사이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했다. 광복 이후인 1948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서울지법 민사지법과 형사지법의 부장판사를 지냈고, 1976년 대법원 판사가 됐다. 1980년에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해 사형 확정 판결을 내리는 데 관여했다. 대법관 퇴임(1986년) 후에는 국정자문위원과 안중근의사사업추진위원회 고문을 거쳐 92년부터 법무법인 광화문에서 변호사로 활동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