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줄거리
캐나다에 아내와 아들을 보낸 기러기 아빠와 프리랜서 영화평론가는 원룸에 함께 산다. 기러기 아빠는 매일 이메일 답장을 기다리는 낙으로 고단한 삶을 이어가지만, 어느 날 아내로부터 결별을 알리는 이메일을 받는다. 동성연애자인 프리랜서 영화평론가는 잘나가는 변호사 '남자 애인'과 사귀었으나, 그로부터 여자와 약혼한 사실을 통보받는다.
가족과 연인에게서 버림받은 기러기 아빠와 영화평론가는 서로의 내밀한 꿈과 고민을 나누지 못해, 밖으로만 겉돌고 마는 고독한 현대인의 초상을 보여준다.
(최홍렬기자 (블로그)hrchoi.chosun.com)
■당선소감
봇물 터지듯, 마구 이야기 쏟아내고픈 날이 있습니다.
세상일에 관심 없고, 자기네들끼리 이상한 문화나 만들어낸다며 눈총받는 세대이지만, 나와 내 주변을, 그리고 당신을 말하고 싶음은 분명 세상에 대한, 인간에 대한 애정입니다. 관심이고, 안타까움입니다. 일상을 지내며 그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서 오늘도 입이 근질근질한 저는, 저 자신을, 삶을, 그리고 인간을 가슴 터지도록 사랑하나 봅니다. 그리하여 다시, 봇물 터지듯, 마구 이야기 쏟아내고픈 날이 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 떨리는 분들께서 제 소통의 첫 물꼬를 터 주셨음이 큰 영광입니다. 심사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또한 든든한 뒷심인 사랑하는 제 가족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과 함께 오랜만에 화젯거리를 제공할 수 있게 되어 기쁘고, 성실하지도 살갑지도 못했던 이 제자에게도 귀한 가르침을 주셨던 서울예대의 교수님들께 철 지난 안부 대신 감사를 전합니다. 끝으로 힘들 때 약이 되어주는 에이미 만(Aimee mann)의 노래에, 유쾌하고 정 많은 소중한 친구들에게, 많은 것이 고마운 그 사람에게, 그리고 제 작품으로 저와 소통해 주실 당신에게도 감사를 전합니다.
■심사평
100여 편의 응모작들 중에서 오혜원의 '일요일 손님', 박중현의 'VICTORY factory', 고자현의 '매일 메일(E-mail) 기다리는 남자'가 최종심에 올랐다. 이 세 작품은 모두 갈라지고 나눠지는 인간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균열 현상이 매우 심각함을 반영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일요일 손님'은 가족을 멀리 외국에 보내고 외로움 때문에 남의 집을 불쑥 찾아가 훼방을 놓는다는 설정을 아기자기하게 극화했으나, 소품이었다. 'VICTORY factory'는 오랜 불경기로 부도난 공장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풍자적이고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풍비박산나는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욕설에 가깝고, 심지어 분뇨를 뿌리는 행동까지 하는 것은 지나친 설정이었다. '매일 메일(E-mail) 기다리는 남자'는 가족의 해체, 부부의 파탄, 애인과의 결별 등을 다양하게 변주하고 있다. 동성애를 포함한 모든 인간 관계가 균열되자,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고독이 작품을 듬직하게 만들었다. 이 세 작품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은 '매일 메일(E-mail) 기다리는 남자'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정진하기 바란다.
(임영웅(연출가), 이강백(극작가, 서울예대 교수)
■ 희곡 당선작 전문 매일 메일(E-MAIL) 기다리는 남자 고자현
민기 - 35세. 일명 기러기아빠. 은수 - 하연의 연인. 수진 - 민기의 아내.
무대 좌측에는 비스듬히 침대가 놓여있고, 가운데에는 커다란 창이 있으며, 창 앞에 책상이 있고, 책상위엔 컴퓨터 한 대, 차곡차곡 싸인 책들. 우측으로는 간단한 책장. 그 옆엔 욕실로 통하는 문. 무대 우측은 원룸으로 통하는 문.
셔츠 주머니에 있는 담뱃갑을 뒤적여 담배를 찾지만 비어있다. 홧김에 구겨 던져버린다. 뭔가 불안한 듯. 손톱도 물어뜯고. 두리번대다가 핸드폰을 발견한다. 이것저것 누르며 확인을 하다가 실망하는 표정. 전화를 건다. 한참을 기다리지만 받지 않는다. 고개를 떨군다.
담배를 찾으려 주머니를 뒤적이지만 조금 전에 팽개친 걸 알고 허탈. 라이터만 나온다. 가락으로 담배 끼운 시늉을 하며 라이터를 갖다대고 불을 붙이는 시늉. 공갈 흡연. 후~ 침착해진다. 뭐가 잘못 된 것이지? 챙, 탁! 챙, 탁! 라이터로 소리 내며, 창가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초인종 소리. 반응 없는 하연. 몇 번의 초인종 소리가 더 들리다가 열쇠로 문 여는 소리. 민기 등장.
하연 : 선배, 손 안 씻었죠? 민기 : 지금 니 얘기 하고 있잖아. 왜, 은수언니랑 싸웠니? 하연 : (놀라며) 형! 민기 : 아니, 일부러 본 게 아니라, 난 캐나다에 있는 ‘(과장하며)마이 훼밀리’ 한테서 온건 줄 알고 봤지. 실수로. 보다보니, 아니더만. 미안하다. 미안한건 미안한건데, 그런 일이 있으면 이 형한테 털어놨어야지. 우리 마누라, 대학 때 무지 잘나갔던 거 알지? 밀고 당기고, 여러 놈들이랑 경쟁 붙어서 쟁취한 산 증인을 두고, 얘가 뭐 하는 거야, 정말. 자, 문제가 뭐야? 영화칼럼 쓴다길래 쫓아다녀 봤더니, 그게 아니더래? 앞날을 생각하니 깝깝하대지? 이젠 싫증 났대지? 그게 말이다, 원래 여자란...... 하연 : (말을 자르며) 저, 자요. 민기 : 알았다 임마. 근데, 너 정말 잘꺼냐? 하연 : 네. 민기 : 세수도 안하고? 하연 : ... 민기 : 각질 어쩌고 하면서 나한테 잔소리 하던 장본인이잖아, 너. 좀 까칠해 진 것도 같고. 하연 : 몰라요. (사이) (슬쩍) 까칠해...... 보여요? 민기 : (이때다 싶은 목소리로) 그래 임마. 요즘 날씨가 건조해져서 그런지 피부가 허옇게 일어나더라, 너. 특히나 요즘 공해도 심해지고, 이 집, 새집이잖아. 새집 증후군 몰라? 애들도 아토피 땜에, 얼마나 난리니. 하연 : (얼굴을 만지며) (약간 아줌마 같은 말투로) 요즘 좀 당기긴 해요. 민기 : 거봐. (가방에서 뭔가를 뒤적거리다 책자를 하연에게 건네며) 이거 한번 안 써볼래? 이번에 호주에서 새로 나온 수분팩인데, (TV광고 흉내 내며) 조인성이처럼 되면 어쩌라고~ TV에서도 그러잖아. 남자도 가꿔주는 게 예의인 시대야. 우리 제품은 화학약품 안 쓰고 자연에서의 재료들을 그대로 써서... 하연 : (책자를 뒤지며) 형, 이런 것도 해요? 회사 짤렸어요? 민기 : 짤리긴. 투잡스(two-jobs) 몰라? 하연 : 저녁때 칵테일 바(bar)에도 나가잖아요. 민기 : 어? 그럼 쓰리 잡슨가? 하하. 하연 : 전에 살던 집도 전세로 줬으면, 남은 돈 좀 있을 꺼 아녜요. 민기 : 그거야 캐나다에 집 얻느라 다 썼지 뭐. 에휴, 물려받은 재산으로 집 걱정, 먹을 걱정 없는 니가 뭘 알겠니. 하연 : (애처롭다) 형, 안 힘들어요? 민기 : 나도 얼른 캐나다에 가서 자리 잡으려면 힘들어도 할 수 없지. 가족이 너무 오래 떨어져 있는 것도 안 좋아. 그래도 우리 민수가 거기서 잘 해주는 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너도 결혼해서 자식 키워보면 알꺼다. 하연 : 대한민국 아버지들은 왜 고생을 사서 하는지. 어쩌면 우리 사회가 강요하는 건가? 암묵적으로. 민기 : 김빠지는 소리 하려면 그만 주무시지? 하연 : 정글에서 살아남기 보다 더 피곤할 꺼 같네. 민기 : (총쏘는 시늉하며) 두두두두두두두......다 죽었어! 큭큭...... 원래 전장에서 살아남은 람보는 멋있는 거야. 어, 늦었다. 메일 확인 해보고 얼른 준비해야겠네.
민기 : (어금니 꾹 물고) 네. 그럽죠. (키보드 두드리다가) 됐냐? 하연 : (화면을 한참 보다가 민기와 눈 마주치면 괜히 미안한 듯) 뭐...각자 사생활이니깐. 민기 : 됐네요, 이양반아. 자던 거, 마저 주무셔요. 후배님.
하연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고 누워 골몰히 생각 중. 민기, 부지런히 키보드를 만지다가 실망하는 표정.
민기 : 글쎄. 하연 : 한쪽이 일방적으로 조바심내기 시작했다는 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거, 맞지? 민기 : 아마도. 하연 : 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다는 말, 맞는 것도 같애. 민기 : 후후... 신파 하고 있네. 하연 : 후후... 유치해? 민기 : 유치하지 임마. 아,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네, 사랑. 우리는 왜, 동화책이나 영화 같은 데에서 ‘그래서 그 둘은 결혼하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맺잖아. 왜 거기서 끝인지 아니? 그 이후까지 보여주면 너무 구리거든. 생활이라는 게 있잖니, 아침 출근길에 아내랑 아이가 행복하게 모닝뽀뽀 해주는 애들 교과서 그림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걸 인정하려 하지 않고, 툭하면 권태기네, 우울증이네 병을 사서 만드는 건, 참......
민기 : 우리 민수한테만큼은 아등바등, 생활에 지친 지 애비 같은 삶을 물려주기 싫으니까, 이런 피곤함도 까짓 꺼, 감수하는 거야. (사이) 결혼안 한 니가 뭘 알겠니? 하연 : 더 슬퍼지네. 민기 : (은근하게) 그런데, 이보게, 하연군. 하연 : 응? 민기 : 너, 말이 좀 짧게 끝난다고 생각 안하니? 하연 : 응? 아, 예, 형. 민기 : 요즘 많이 힘든가 보구나. 하연 : (누워서 벽 쪽으로 고개 돌리며) 예. 민기 : 욕실, 쓸꺼니? 니 대학 (강조하듯) ‘8년 선배’ 서민기형 샤워 좀 하자. 하연 : 하셔요. 민기, 욕실로 들어간다. 얼마 안 있어 샤워기 물소리.
이때 컴퓨터 음성, ‘딩동,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하연, 침대를 박차고 잽싸게 컴퓨터로 향해 키보드를 두드린다.
하연, 컴퓨터 앞에 본격적으로 앉아 한참을 읽어나간다. 하연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진다. 다소 놀라는 듯, 표정도 굳어지고. 갑자기 초인종 소리. 순간 깜짝 놀라는 하연.
하연 : (놀라며) 예? 예...(문 쪽으로 다가가며) 누구세요?
그는, 남자다.
은수 : 됐어. 잠시면 돼. 하연 : 그럼 들어와. 은수 : (서서) 나, 약혼한다. 다음 달 17일. 하연 : 뭐? 은수 : 그냥 해버리려고 했는데, 그래도 그게 아닌 것 같아서. 하연 : 앞 뒤 다 잘라먹고, 무슨 소리야 지금? 은수 : 말 그대로야. 이 말 하려고 왔어. 간다. (뒤 돌아선다) 하연 : 그래서 연락이 안됐었구나. 미리 약 치러 온 거니? 은수 : ... 하연 : 촉망받는 경제전문 변호사 김은수가 알고 보니 게이더라, 소문 낼까봐서? 은수 : 아닌 거 알잖아. 하연 : 누구야? 은수 : 여기까지만 하자. 하연 : 그것도 비밀이야? 은수 : 선봐서 만난 여자야. 적당해. 피곤하지 않고. 하연 : 하하! 부럽네, 그 여자. 열렬히 사랑한 사람은 이렇게 한 순간에 버림받는데, 적당함에도 불구하고 남자를 가로챈다? 여자라는 옵션으로? 하! 근데, 너 참 잔인한거 알아? 그 여자, 불쌍하다. 자기 남편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떨까. 오! 불쌍한 여인. 은수 : 그 여자도 다 알아. 우리 둘은 단지 번듯한 가정이 필요해서 합의를 한거야. 여러모로 안정된 가정이 훨씬 득이 될 것 같고, 이왕이면 서로 피곤하지 않는 상대를 고르다보니 그렇게 됐어. 내입으로 이런 거 까지 말하는 거, 유쾌하지 않아. 하연 : (매달리듯) 그럼 문제될 것 없네. 몰래 계속 만나면 되는 거잖아. 아니, 그 여자도 다 안다고 했지? 소개시켜 줘. 떳떳하게 만나. 셋이 만나면 오해도 없고. 아, 그쪽도 파트너가 있나? 넷도 좋지. 은수 : 그만하자. 나 좀 놔줘! 하연 : 실컷 잘 데리고 놀다가, 뭐? 결혼 때문에 떠난다고? 뉴욕에서는 되고, 서울에서는 안되는 게 뭔데? 뉴욕에서는 할 수 있는 사랑이 왜 항상 서울에서는 안 되는데? 거긴 알아보는 사람이 없고, 여긴 아니니까? 은수 : 잘 아네. 난, 너처럼 사랑만 가지고 살 수 없는 놈이야. 커밍아웃? 그게 변호사로써 얼마나 큰 감점인 줄 아니? 너같이 영화평 긁적대는 애야 더 있어 보이는 그 뭔가가 될 지도 모르겠지만, 난 아냐. 인권변호사도 진보도 뭐도 아니고, 늙다리들 상대로 말품 팔아서 이름 날리고 먹고사는 속물이야. 너도 이 땅에서 안 피곤하게 살려면, 그냥 숨죽여 살아. 하연 : 정 힘들면, 다른 커플들처럼 더블라이프로 살아도 되잖아? 은수 : 피곤하다. 어쨌든 미안해. 너도 잘 살아라. 갈게.(돌아선다) 하연 : (은수를 뒤에서 안으며) 어떻게 잊을래? 은수 : (하연의 팔을 뿌리치며) 좋은 기억만 갖자, 우리. (퇴장)
욕실 문이 열린다. 샤워 가운을 입은 민기, 어색하다. 한참 하연을 쳐다보다가 하연이 뒤 돌아서자 눈이 마주치면 민기, 고개를 떨군다.
하연 : 다...들었죠? 민기 : (갑자기 샤워가운만 입은 자신의 매무새를 만지며) 아...아냐.
민기, 하연의 눈치를 보다가 소파에 앉는다. 테이블 아래쪽에서 큰 가방을 꺼내 주섬주섬 짐을 싼다. 옷을 대강 챙겨 입고 나가려다가 잠시 멈칫. 한숨을 쉬고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아서 메모를 한다.
민기 : (놀라서 메모를 멈추며) 엉? 하연 : 문제가 되긴 되는 거구나. 걱정 말아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우리끼리만 만나니깐. 민기 : 무...문제라니. 나도 다양성을 존중해. (산만하고 어색하게) 취향문제지. 하연 : (비꼬듯) 그래요? 나 좀 안아줄 수 있나요? 민기 : 하하하... 얘가 왜 이래. 하연 : 것 봐.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민기 : (가방을 내려놓으며)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솔직히...... 솔직히 거북해, 니들 같은 취향. 은수양이 아니라 은수군 이라는 사실도 유감이구나. 근데 그 은수‘군’의 얘기, 틀린 거 없어. 그게 사회생활이고, 나 무식하다고 해도 할 수 없는데, 나 너네 같은 애들 솔직히 적응 안돼. 은순가 하는 놈처럼 정신 차리고, 이 사회에서 밥이라도 먹고 살려면 너도 숨죽이고 살아. 그게 사회생활 오래해 본 선배로써 하는 마지막 충고다. 그동안 재워줘서 고맙다. 원망마라. 같이 살았던 정이 있어서 솔직하게 얘기 한 거니깐. 하연 : 형도 나도,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내동댕이쳐진 건 마찬가지잖아요. 민기 : 무슨 소리야? 하연 : 연인에게서 버림받은 나,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형. 민기 : 무슨 소리냐고! 하연 : 메일, 봤어요. 보려고 본 게 아니라, 은수한테서 온 메일인 줄 알고. (기운 빠진 듯 웃으며) 형이 실수한거처럼 나도 실수했어요.
민기 : 알 거 없어. 하연 : 여기서 나가면 갈 곳이나 있어요? 민기 : 무슨 뜻이야? 하연 : 형 건들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말고 여기 있어요. 민기 : 불쌍하니, 내가? 그동안은 체면 불구하고 얹혀 있었는데, 이젠 너의 그 요상한 취향이 불편해서 싫다. 하연 : 요상한 취향이라... 민기 : 그냥 모른 척 해주지. 소문내지 않으마. 하연 : 고맙네. 내가 보기에는 형도 정상이 아닌데, 나도 소문내지 말아 줄까요? 우리도 합의합시다. 은수와 그의 멋진 피앙세가 그랬듯이. 좋네. 간단하고. 민기 : (하연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으며) 함부로 말하지 마. 내 가족을 모독하지 말라고! 하연 : 형수, 그러니깐 수진선배가 보낸 메일 보는 순간, 비록 잠시지만, 나랑 참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남자친구한테 버림받은 남자고, 형은 뼈 빠지게 고생하고도 버림받는, 가장이라는 이름의 남자고. 둘 다 외롭긴 마찬가지잖아요. 형, 바보처럼 삼키지 말고, 뱉어요. 외로움이라는 거, ‘독’이예요!
창문 앞, 조명이 들어오면 민기의 부인, 수진이 앉아 있다. 그녀의 모든 대사는 모두 메일의 내용. 이제부터 민기, 하연, 수진 이 세 사람의 대사가 서로 엉킨다. 민기는 이 둘의 이야기에 혼란스러워 하면서 상황은 진행된다.
민기 : 정대리도 나랑 똑같아. 그 친구도 뉴질랜드에 있는 처자식한테 돈 붙여 주는데 뭐. 우리 기러기 아빠들은 힘들다고 생각 안 해. 민수는 열심히 하고, 당신은 잘 챙겨주고. 하연 : 형 보니깐 우리 아버지 생각난다. 말붙이기 조차 거북했던 무서운 우리 아버지. 민기 : 기러기아빠. 혹은 펭귄아빠. 이 시대가 요구하는 멋진 아버지. 자녀의 질 좋은 교육과 보다 나은 생활을 열어주는 우리 가정의 도우미. 가정이라는 우리 팀을 사회라는 거대한 그라운드에 당당히 맞설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나는, 우리 가족의 영원한 ‘붉은 악마’. 수진 : 당신은 남편으로서, 애 아빠로서는 누가 뭐래도 1등감이야.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 연애시절에 내가 사랑했던 서민기와 결혼하게 되어서 나 정말 좋았어. 당신이 대학시절 그렇게 좋아하던 영화일도 포기하고 가정을 위해 취직하는 모습 보면서 안쓰럽고, 그러면서도 믿음직했었던 건 사실이야. 민기 : 그래, 나, 나와의 가정을 선택한 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영화도 포기하고 취업 준비했지. 대기업 공채사원. 남들이 놀라워 할 만큼 한방에 붙어줬고. 다 당신을 위해서였어. 하연 : 어느 날, 내가 너무 놀랐던 건 우리 아버지가 바이올린을 꽤나 잘 연주하던 사람이라는 거. 아, 불쌍한 우리 아버지. 식솔들 먹여 살리시느라 바이올린을 창고에 쳐 박아 두신거로구나. 손 때 묻은 악보들과 함께. 뭐랄까. 최초의 연민이랄까? 수진 : 처음엔 당신이 너무 자랑스러웠어. 그래서 결혼을 더욱 서둘렀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매일 밤낮없이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고, 접대 때문에 술에 쩔어서 들어오고, 그런데도 늘 같은자리만 맴도는 우리 형편을 보니깐, 내가 너무 서둘렀나, 싶고, 그래서 민수 낳고 일이라도 해볼까 해서 돌아다녀봤더니 애 딸린 유부녀를 받아주는 데는 식당밖에는 없더라. 그래도 명색이 남들 부러워하는 대학 나온 사람인데.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전문직 유부녀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열등감이 느껴졌었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민기 : 그래도 우리 별 탈 없이, 그 정도면 행복한거 아니었나? 하연 : 우리 엄마는 불행했어. 민기 : 불행? 하연 : 더 이상 여자로 보지 않는 남편. 엄마는 엄마이기도 하지만 여자이기도 해. 수진 : 기억나? 아웃소싱이라는 단어 하나 모른다고 나랑 눈도 안 마주쳤던 일. 민기 : (머뭇거린다) 그건...... 피곤해서였지, 아내를 무시해서가 아니라고. 하연 : 자식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 해주고, 남편한테 그나마 살림 잘한다고 인정받으려면 알뜰하게 살림도 불려가야 하고. 열심히 살아가느라 억척스러워지면 팍팍한 여편네, 하고 핀잔이나 주는 남편 때문에 상처 받고. 수진 : 많이 사랑했어. 당신하고 꾸린 가정이, 내가 성공하는 것 보다 어쩌면 더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너무 생활에 일찍 적응해 버리는 바람에, 우리 둘, 문제가 커졌다는 생각, 요즘 많이 해. 민기 : 무슨 철없는 소리야? 그게 가족이라는 거라고. 사랑이 변한 게 아니라, 가족이라는 새로운 체제로 그 형태가 변하는 것이지, 본질 자체가 변하는 건 아니잖아. 내가 회사에서 죽어라 일하고, 끝나면 칵테일 바에, 대리운전, 그것도 모자라 틈틈이 다단계까지, 쇠골 빠지게 왜 일하는 건데. 내 입속 차리려고? 다 우리 식구들 위해서 인거 알잖아. 지금 연애시절 사랑 운운 하는 거, 배부른 소리라는 걸 모르겠니? 그래, 우리 민수 대학 보내고 나면, 다시 사랑해보도록 하자. 약속할게. 수진 : 당신 피곤해서 신경질 낼까봐 아플 때에도 참다보면 나, 참 외롭더라. 하연 : 엄마나 나나, 참 많이 외로웠어.
수진 : 한편으로는 내가 배부른 고민을 한다고도 생각했어. 애들 키우고, 생활하기도 바쁜데 남편한테 연애시절 사랑까지 요구한다는 거 자체가 무리였지. 그런데 말야, 내가 이상한거라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나, 더 이상은 그러기 싫어. 그래도 명색이 영문과 학생이었는데, 열 살도 안 되는 애 보다 영어가 더디고, 아들 녀석이 신통 방통 한 게 자랑스럽기보다는, 너무 부끄럽고 나 자신이 싫어졌어. 하연 : 우리 엄마, 참 많이 힘들었을 거야!
민기, 하연을 바라보다가, 그의 곁으로 다가가 멍하니 앉는다.
하연 : 엄마 돌아가시던 날, 난 난생처음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민기 : 왜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거지? 하연 : 엄마는 죽어가는 데 너무 무서웠어. 그래서 아버지한테 전화했더니 우리 아버지, 사내 녀석이 무슨 일만 있으면 쪼로록 전화질이나 해댄다면서, 기다리라고, 오히려 날 나무랐어. 아버지가 일하는 거지 노는 거냐고. 알지, 우리 아버지, 30년 근속사원인거. 충견인거. 하지만 엄마가 내 옆에서 아프다고 울부짖는데, 아버지 불러달라는 목소리까지 점점 무서워지는데, 그걸 어린 나 혼자 어른스럽게 대처하라고? 엄마가 불쌍하다 못해 무서운 상황을 나 혼자 겪으라고? 수진 : 우리 둘 이름 따서 이름 지은 우리 민수, 이제는 영어이름 매튜가 더 익숙해. 민기 : 난 여태까지 뭔 짓을 한거야? 뭐하며 산거니, 서민기! 수진 : 매튜 옆에서 같이 공부하면서 나 영어도 많이 늘었고, 일자리도 구했어. 민기 : 그냥 돈이나 벌어다 주는? 수진 : 자꾸 설득하려 하지 마. 한 달 내내 당신은 모른 척 계속 돈 부치고, 나는 다시 돌려보내고 하는 거, 이젠 지긋지긋해. 당신 집착이 무서워. 민기 : 하하하...서민기... 개처럼 일해 정승처럼 쓰지도 못하고, 결국 이 꼴이냐. 수진 : 소용없는 짓, 더는 말자. 민기 : 난 괜찮은데. 수진 : 이젠 당신한테 부담 안 줄 테니깐.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 더 늦기 전에 각자 새롭게 시작하자, 우리. 민기 : (괴로워하며) 아니지, 이건 아니야. 이... 이 여자... 바람난 게 분명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며) 확인해 봐야겠어. 하연 : 바보 같은 짓, 우리 아버지 하나로 끝내자. 민기 : 국제전화는 어디가 싸더라? 하연 : (민기 핸드폰을 뺏으며) 왜 그렇게 추하게 굴어? 민기 : 전화, 안받지?
주저앉는 민기. 정신이 나간 듯 하다.
민기 : 여자 혼자 살기 힘든 세상이야. 그것도 애 까지 데리고. 하연 : 그래서? 민기 : 내가 가장이잖아. 하연 : 그 잘난 가장 소리 작작 할 수 없어? 좀 비극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형수가 형한테 새로운 인생의 기회를 준거잖아. 그렇게 산뜻하게 생각하자. 응? 민기 : 민수... 나처럼 영어 때문에 버벅대지 말라고 보냈는데. 하연 : 그동안 형은? 민기 : 내가 가장이잖아. 하연 : 우리 아버지 생각나서 미칠 것 같다. 민기 : (하연을 밀쳐내며) 임마, 니가 펜대 굴리면서 잘난 척 사는 게, 누구 덕인 줄 알아? 하연 : 아버지 덕이라고? 가족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한다며 평생을 일 중독자로 살았던 아버지 덕이라고? 돌아가신 엄마가 밤마다 꿈속에서 네 아버지한테 잘해라, 하는데, 아주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 더 화가 나고, 더 살의가 생겼다고! 엄마를 저렇게 귀신이 되어서까지 세뇌시켜버린 잔인한 인간! 이 인간을 어떻게 혼내주지? 그 인간 심장에는 도대체 사람의 피라는 것이 돌기는 하는 걸까? 제대로 작동이나 하는지 확인 해보게 칼이라도 꽂아볼까? 별별 끔찍한 생각 다 했다고! 그런데...... 그 냉혈한, 우리 아버지, 어떻게 돌아가신 줄 알아? 30년 근속 사원 공로패 받던 날, 결국 과로로 쓰러졌어. 충성의 ! 댓가라는 게 고작, 공로패라는 이름의 돌쪼가리랑, 작업장에서의 장렬한 죽음이었다고! 하하하... 나에게 기회도 안주고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버리다니... 민기 : (하연의 멱살을 쥐며 주먹으로 때리며) 후레자식. 지 아버지 심장에 뭘 꽂아? 하연 : 형... 우리 아버지랑 많이 닮았어. 민기 : 뭐? 하연 : 아버지가 또 한번 죽어가는 거... 싫다, 정말. 민기 : ... 하연 : 난 아버지가 된다는 게 너무 싫었어. 민기 : 그래서 남자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 다닌거니? 하연 : 함부로 말하지 말랬지?
마음이 답답한지, 방안을 뱅뱅 돌기도 하고. 그래도 풀리지 않는 듯.
하연 : 아까도 말했지만, 형수가, 아니 수진선배가 형한테 기회를 준거야. 그것도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이 기회에 조용히 둘 사이를 다시 생각해봐. 그놈의 가장 소리는 집어치우고, 남자 서민기와 여자 김수진으로서의 관계를 말야. 민기 : 오늘 밤새 칵테일 만들고 혹시 대리운전 나가게 될 지도 모르니깐, 졸면 안 되겠지. (싱크대로 다가가 주전자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다.) 하연 : 외롭다는 거, 힘들다는 거, 그런 거 드러내놓고 말할 수 있는 게 사랑이야. 우리 아버지나 형처럼 꾸역꾸역 혼자서만 짊어지려고 하는 걸, 누가 알아주기나 하는 줄 알아? 민기 : (초조해하며) 입 다물어. 하연 : 그 칵테일 바 때려 치워. 보는 사람도 답답해. 지겹고 화가나. 민기 : 입 다물라고 했지!!!
민기 : 난 펭귄아빠야. 턱시도 같은 복장으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깍듯하지. 그만큼 아주 신사적이야. 내 아내가 알을 낳을 때, 차가운 빙판에 행여 다칠세라, 보드라운 털이 있는 내 두 발위에 알을 낳도록 하지. 춥지 않게 하려고. 내 새끼니깐. 알이 부화할 때 까지, 이놈이 멋지게 알을 깨고 제 구실을 할 때 까지, 계속 지켜주느라 먹고 싶은 거 참아가며, 추위에, 그래도 내 새끼니깐, 지켜주고 있었는데...... 아내가 그런 나를 잊어간다는 걸, 떠나가는 걸 알아채지도 못하고 내 할 일, 그것만 충실히 하면서 견뎠는데...
민기는 주먹질을 멈추고 웅크려 울기 시작한다.
이때 초인종 소리. 처음엔 한번, 그다음엔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울린다. 쿵쿵쿵~ 쿵쿵쿵~ 누군가가 주먹으로 문을 두드린다. 현관에서는 남자의 목소리, 정대리다.
아, 이 양반, 전화도 안 되고. 안에 없나? (쿵쿵쿵, 문 두드리며) 저기요, 예?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주전자의 휘슬소리는 더욱 요란해 지고,
핀 조명이 민기를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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