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키퍼 이운재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골대 중앙에 서서 장갑을 몇 번 마주쳤다. 스스로에 대한 긴장감을 높이면서 마음을 다잡기 위한 특유의 제스처였다. 페널티킥 지점에서 이운재를 노려보는 상대는 독일 축구의 미래 미하엘 발락(29·바이에른 뮌헨).
발락이 공에서 뒤로 5~6m 떨어졌다. 페널티킥 지점과 골키퍼의 거리는 11m. 키커가 찬 공이 골라인을 통과하는 시간은 0.4초. 골키퍼는 0.15초 안에 방향을 정하고 몸을 던져야 한다.
발락이 공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자 이운재는 순간 스텝을 골대 오른쪽으로 조금 움직였다. 발락의 공을 골문 왼쪽으로 유도하기 위한 이운재의 ‘유도 액션’이었다.
예상대로 발락의 총알 같은 강슛은 골대 왼쪽을 향했고, 이와 동시에 이운재는 몸을 오른쪽으로 잽싸게 날려 장갑낀 손으로 발락의 슛을 쳐냈다.
승리한 이운재의 손이 허공을 갈랐고, 부산 월드컵경기장에 모인 4만5000여 관중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2006 독일월드컵에서 개최국인 독일의 성적이 그의 발끝에 걸렸다고 할 정도의 간판스타, 발락은 고개를 떨궜다. 이동국의 그림 같은 슛으로 만든 한국의 2 대 1 리드 상황이 그의 슛 한 방에 무너질 수 있는 순간이었으나 그는 고개를 떨궜다.
“고등학교 때 맞아가며 승부차기 배워”
승부는 그걸로 끝이었다. 한국은 종료 4분 전 또 한 골을 추가, 2002년 월드컵 4강전에서 우리를 1 대 0으로 물러나게 했던 독일을 무릎 꿇렸다.
“패널티킥 때 발락이 오른쪽으로 찰 거란 예상을 했어요. 제가 오른쪽으로 차도록 유도했거든요. 스텝을 왼편으로 세 번인가 밟았어요. 짧게 파박! 차는 사람도 날 속이기 위해 수를 쓰는 거고 나도 상대가 걸려들게끔 계산을 하는 거죠. 패널티킥을 막아낸 후부터 우리 선수들 사기가 확 올라갔어요.”
“한국이 처음으로 클린스만의 뺨을 쳤다.”
12월 20일자 독일의 전 언론들은 한국 축구 대표팀이 독일을 3 대 1로 대파한 이 경기를 두고 위르겐 클린스만(40) 독일 대표팀 감독의 첫 패배를 대서특필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준우승팀이자 FIFA 랭킹 16위인 독일 축구에 뺨을 때린 주인공은 물론 골잡이인 김동진·이동국·조재진이었지만 정작 승부를 가른 장본인은 이운재였다.
12월 23일 서울 코엑스 인터컨티넨탈호텔 1층 로비에서 만난 이운재. 제18회 올해의 프로축구 대상 ‘올해의 선수상’ 시상식이 있는 날이라 그는 쥐색 정장에 넥타이를 반듯하게 매고 있었다. 골키퍼가 ‘올해의 선수상’을 받기는 18년 만에 처음이라고 했다. 늘상 땀에 절어있던 머리칼도 이날은 헤어젤로 깔끔하게 넘긴 상태였다.
182㎝·80㎏의 ‘천하장사’ 같은 커다란 몸집인지라, 상대적으로 훨씬 작아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시지 않는다. 기쁨이 한껏 묻어난다.
‘거미손’으로 월드컵 때 자신과 마지막까지 경합하다 야신상을 가져간 세계 최고의 문지기인 올리버 칸의 콧대를 눌러버린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이운재는 이렇듯 ‘페널티킥 방어의 1인자’에 손색이 없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스페인전에서 호아킨의 킥을, K리그 챔피언결정전 포항과의 승부차기에서는 김병지의 킥을 막아낸 데다 12월 19일 독일전에서는 발락의 페널티킥까지 방어했다.
0.01초에 상대의 움직임을 간파해 순간적으로 몸을 날려야 상대의 킥을 막아낼 수 있는 페널티킥의 승부는 기(氣)와 동물적 감각의 싸움이다.
“승부차기의 경우 그 자리에 서게 되면 먼저 예측을 하죠. 그건 타고나는 것도 우연한 행운도 아닌 연습과 노력의 결과예요. 고등학교 때 전 매맞아가면서 승부차기를 배웠어요. 피가 마르는 훈련이 없으면 판단력은 물론이고 기본적으로 몸이 안 따라가요.”
이운재는 “온몸의 긴장도가 최고조로 올라가는 페널티킥 키커와 맞닥뜨리는 상황, 그 순간의 상황을 즐긴다”고 했다. 지난 12월 12일 포항·수원삼성전에서는 1번부터 5번까지 키커를 정확히 맞혔고, 키커마다의 선호하는 방향과 킥 상황을 머릿속에 완벽하게 그려놓았다고 했다. 그가 김병지의 승부차기 골을 가뿐하게 막아내 팀을 승리로 이끈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형(김병지)이 그렇게 찰지 알고 있었어요. 승부차길 하게 되면 두 가지 유형이 있어요. 하나는 머릿속에 한 점을 정해놓고 그 곳으로만 차는 사람이 있고, 골키퍼를 보고 뛰는 사람이 있어요. 가만히 있다가 내가 움직이는 걸 보고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차는 사람이죠. 김병지 형이 두 번째 타입이거든요. 그런 타입은 골키퍼가 안움직이면 당황하게 되고 공도 약할 수밖에 없죠. 나만의 노하우가 있는 거예요.”
불필요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전략뿐 아니라 이운재의 눈싸움도 유명하다. “눈에 해답이 담겨 있기 때문에 슈팅 직전까지 키커를 주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키커의 발목. 0.01초대의 시간이지만 발목 위치에 따라 볼의 방향이 결정되는 만큼 이를 확인하고 움직여야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김현태 부천 SK 코치도 “이운재가 패널티킥에 강한 이유는 순간적인 판단과 동작이 다른 골키퍼들에 비해 휠씬 빠르기 때문”이라며 “플레이스타일이 침착한 편이라 때로는 골키퍼치고는 굼뜨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이운재의 순발력을 아는 사람이면 절대 그런 평가를 하지 않는다”고 평했다.
승부사 기질이 강한 이운재. 그는 냉커피를 한입 쭉 들이켜더니 왕방울만한 눈으로 허공을 쏘아봤다. “골키퍼는요, 실수가 바로 골이에요. 수비나 공격은 한 번 실수하더라도 다른 선수들이 수습해줄 수 있는데 골키퍼는 단 한 번 실수로 끝나는 거예요.”
청주 청남초등학교 5학년 때 육상(공던지기)에서 축구로 바꾼 이운재는 공격수로 활약했으나 청주상고 1학년 때 골키퍼로 변신했다. 뛰는 게 느려 달리기할 때마다 팀원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다보니 일찌감치 골키퍼로 전향한 것이다.
경희대 재학시절인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출전한 뒤 그는 1994년 미국 월드컵 독일전서 후반에 깜짝 투입돼 45분간 무실점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곧 불운이 잇따랐다. 1996년 간염보균자로 드러나면서 국가대표팀을 나오고 청주상고 대선배인 박철우에게 골문을 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년여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국가대표로 되돌아왔지만 이미 주전자리는 김병지에게 넘어가 있었다. 92㎏이었던 몸무게가 80㎏으로 줄 때까지 피튀기는 체력훈련이 계속됐다. 그리고 1998년 그는 수원 삼성을 프로축구 정규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5m 앞에서 차면 공 어디로 올지 보여”
‘달리기 꼴찌’ 이운재가 한국 최고의 스타 골키퍼로 다시 태어난 건 순전히 ‘노력’ 때문이었다. “기량이나 재능보다는 노력이 중요해요. 재능은 필요없는 거예요. 저는 재능이 없어요.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운동 열심히 한다는 거 하나밖에 없어요.” 너무 겸손하게 그러지 말고 잘 나가는 골키퍼로서 훈련 비법을 내놓아보라고 말했다. “정말 훈련시간에 충실한거 밖에는 없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리다 고등학교 때 밥먹고 줄넘기만 했던 시절을 떠올린다.
2단 뛰기는 1단처럼, 3단뛰기는 한 번에 500개씩. 점프력과 민첩성을 위한 훈련이었다. 3단 뛰기가 300개가 넘어가면 손은 알아서 줄을 돌리고 다리는 제멋대로 풀쩍풀쩍 뛰더라고 했다. “그리고 집중력이요! 차가 휙 지나가면 번호판 외우고 광고판 지나가면 그걸 순간적으로 보고 기억해내려 애썼어요. 공은 그것보다 훨씬 빠르거든요. 눈 깜빡하면 들어가 있거나 정수리에 정통으로 맞아떨어져요.”
골키퍼에게 날아오는 공은 숙명이다. 최근 독일과의 친선경기에서 상대선수의 머리에 코를 부딪힌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5m 정도 앞에서 차면 골이 어디로 올지 다 보여요. 연습을 많이 하면 무의식적으로 그런 공은 다 차내는 거예요. 그런데 2~3m 앞에서 (상대가 공을) 때려버리면 아파 죽는 거죠. 내 몸 하나 아프더라도 골 안먹으면 그걸로 된 거죠.”
“중요한 곳을 제대로 맞으면 배까지 아프다”며 웃는 장난기 가득한 눈도 골문 앞에만 서면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워진다. 왜 늘상 눈에 힘주고 있냐고 했더니 “상대에게 약하게 보이면 안되기 때문”이란다.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골키퍼가 말랑말랑하게 보이면 기싸움에서 지는 겁니다. 저도 사람인 이상 친구 만나 수다떠는 거 좋아하고 후배들한테 따뜻하게 대해주려고 해요. 그렇지만 운동장에서만큼은 허투루 보이고 싶지 않아요.”
겉으로 아닌 척하더라도 분명 이운재를 긴장시키는 선수들은 있을 터였다. 누구 공이 제일 무서운지 물어봤다.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내 자신은 없다고 생각해요. 준비를 못했다든가 경기에 소홀하다면 그게 더 무서운 거죠. 제가 다 막을 수는 없는 거예요. 그나마 다 막아버리면 재미 없잖아요. 먹는 골도 있어야죠.(웃음)” 말을 한번 돌리기에 이번엔 칭찬할 만한 선수들 이름을 대보라고 했더니 “내 방어를 뚫고 골 넣은 사람은 다 칭찬하고 싶다”고만 한다.
새해를 맞는 그의 나이 서른둘. 한국 축구에 부는 ‘세대교체 붐’이 조금씩 불안해질 나이다. 요하네스 본프레레 감독은 2006 독일월드컵 2차 예선 과정에서도 “세대교체는 필요한 만큼만 단행할 것”이라고 공언했으며, 이운재·차두리 등 2명을 제외하고 ‘젊은 피’들을 대거 투입한 이번 독일과의 친선경기 결과는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더욱 부채질했다. 서툰 점도 많았지만 간만에 보여준 시원하고 저돌적인 플레이에 축구팬들은 열광했던 것이다.
“‘세대교체’는 누가 원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서로 경쟁하면서 물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많은 젊은 선수들이 호시탐탐 제 자리를 노리고 있어요. 저도 이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하는 거고요. 경쟁을 하는 거예요. 어린 선수들은 경험이나 경기에 대한 노하우가 부족해요. 저도 처음 데뷔할 땐 발이 안 움직일 정도로 떨었어요. 노장선수들의 경기감각이나 노하우는 무시 못해요. 노장들은 목을 짚어가면서 경기를 할 줄 알고 후배들이 어떻게 뛸지 모를 때 지도해 줄 수도 있어요.”
홍명보 선수 나가고 나서 힘들어
홍명보 선수가 떠난 운동장이 그에게 더 휑하게 다가왔을 터였다. “어렸을 때는 명보 형이 서면 심리적으로 많은 안정감을 찾았어요. 선수들 조율을 많이 해주셨거든요. 명보 형 나가고 나서 좀 힘들었어요. 요즘은 제가 후배들을 이끌어가야 하니까 사명감도 생기고, 책임감이 생기니까 집중력도 강해졌습니다.”
그는 세대교체의 실험장이 된 이번 친선경기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어린 선수들은 자신감을 얻었고 해외에 있는 선수들은 자극을 받았을 거란 얘기다. 그는 이번 친선경기를 통해 해외파 선수들이 자기자신을 냉정히 바라보고 다시 한번 몸과 마음을 추슬렀으면 좋겠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본프레레 감독이 한국 축구팀의 지휘봉을 잡은 지 반 년이 지난 지금. 본프레레 감독은 월드컵 4강신화를 이뤄낸 히딩크 감독과 끊임없이 비교당하며 시험대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본프레레 감독도 한국과 한국 선수들에 대해 점차 알아가는 중이에요. 히딩크 감독은 자기만의 색깔을 뚜렷하게 찾아간 사람이고 본프레레 감독도 자기 색깔이 있고 조금씩 그걸 찾아가려 하지만 난관이 많은 것 같아요. 히딩크 감독은 모든 선수들을 데려다 시험하고 뛰게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잖아요. 선진 축구·좋은 축구를 하게끔 도와달라는 게 제 바람이에요.”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도 그의 활약을 기대할 수 있을까. “월드컵까지가 아니라 전 그냥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할 뿐이에요. 물론 2006년까지 뛰고 싶죠. 그렇지만 평가는 감독님이 하시는 거고 만약 어린 선수들이 더 잘 한다면 저는 물러나야겠죠. 전 스스로에게 냉정해요.”
그는 은퇴한 후 골키퍼 전문지도자의 길을 걷겠다고 했다. “감독해서 스트레스 받지 말라”는 부인의 충고도 있고, 몸으로 골키퍼를 체험한 자신의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나눠주겠다는 거다. 감독이 바뀌면 지도자 라인이 죄다 바뀌는 현실과는 달리, 골키퍼 전담 지도자로 우직하게 입지를 굳히고 싶다는 것이다.
진지하게 축구인의 미래를 얘기하는 그에게 “딸(그에겐 생후 14개월 된 딸이 있다)이 크면 축구시킬 거냐”고 물었더니 단호하게 “안 시킨다”고 말을 자른다. “아들이 하겠다고 해도 안시켜요. 제가 고생했기 때문에 별로 시키고 싶지 않아요. 정 하겠다면 말린 순 없겠지만 아이는 그냥 건강하고 해맑게 컸으면 좋겠어요.”
* 이 기사는 주간조선의 허락을 얻어 게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