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원이었던 나의 아버지는 말이 없는 사람이다. 당신이 주장하실 말씀이 있어도 결코 그 말씀을 하시지 않는다. 내게 어려운 일이 있어도 속으로 걱정은 하시면서도 너무 말이 없어 어떤 때는 원망스러움이 앞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올해 여든다섯이 된 아버지를 보면 빈 들판에 서서 한 그루 고목처럼 말없이 내 삶을 형성하신 분이 아닌가 싶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느닷없이 민중서관에서 발행한 32권짜리 ‘한국문학전집’을 사오셨다. 그런데 그 책을 방 안에 두기만 했을 뿐 “이 책 읽어라” 하고 말씀하신 적은 없다. 어디까지나 내 스스로 박계주의 소설 ‘순애보’를 읽거나 시를 읽다가 문학에 눈을 떴을 뿐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 책을 사다주시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는 문학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생 때 친할머니를 이장했다. 관 뚜껑을 열자 관 속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검붉은 추깃물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잔잔히 물결을 일으키자 산역꾼들이 귀한 약이 된다면서 됫병과 주전자에 서둘러 추깃물을 퍼담았다. 나는 놀라 아버지를 쳐다보았으나 아버지는 무덤 한편에 가만히 쭈그리고 앉아만 있었다. “아부지, 저 사람들이 저래도 되는 겁니까? 저 물이 바로 할머니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빨리 가져가지 말라 카이소” 하고 소리쳐도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군에 입대해서 ‘낙엽도 직각으로 떨어진다’는 춘천 보충대에 며칠 있을 때였다. 누가 이등병인 나를 면회왔다고 해서 폭설이 내린 넓은 연병장을 숨가쁘게 달려가자 위병소 앞에 조그마한 한 사내가 낡은 외투깃을 올리고 서 있었다. 아버지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도 아버지는 “배고프나?” 단 한마디뿐이었다.

수평치로 난 사랑니를 두 시간 넘게 어렵사리 뽑고 나서 입에 솜을 꽉 문 채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봉천동 고갯길을 오른 적이 있었다. 그때 문득 뒤를 돌아보자 머리에 허옇게 눈을 맞으며 아버지가 허리를 구부리고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아, 부정(父情)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뼈저리게 느껴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신 대신 편지를 자주 보내주셨다. 신문마다 난 신춘문예 모집 사고를 일일이 오려 군으로 보내주셨으며, 편지 말미엔 반드시 ‘몸조심, 일조심, 사람조심’ 이 세 가지 당부의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그런 정성 덕분인지 나는 군복무 중 문단에 등단할 수 있었다. 제대복을 입고 청량리역에 도착한 내게 아버지가 말없이 내민 것은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는 내용이 타자된 노란 전보지 한 장이었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는 말없이 말씀을 하심으로써 침묵의 힘을 내게 가르쳐주셨다. 아버지가 그토록 말씀이 없으셨던 것은 천성도 그러셨겠지만 은행원으로서 개미처럼 숫자에 매달려 조심조심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아버지는 나이 마흔에 당신 스스로 은행을 그만두고 이런저런 자영업을 하다가 다 실패함으로써 일찍이 실패의 소중한 의미 또한 내게 가르쳐주셨다. 인생에 성공이란 없다는 것을. 되풀이되는 실패의 과정이 곧 인생이며, 그 과정을 인내하는 것이 곧 성공이라는 것을.

나는 지금 시는 실패와 결핍과 침묵에서 나온다는 것을 믿는다. 아버지처럼 말이 없는 데서 말이 이루어지고 보이지 않는 데서 보이는 그 무엇이 시라는 것을 믿는다. 아버지는 이제 청력을 잃었으며, 한쪽 눈이 실명된 지도 오래되었다. 그래서인지 더욱 말씀이 없으시고 매일 기도하고 일기만 쓰신다. 돌아가시고 나서 그 일기를 보고 내가 또 얼마나 울 것인가.

(정호승 시인)

정호승은

1950년 경남 하동 출생. 경희대 국문과 출신으로, 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부문에 당선돼 등단했으며, 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시 부문), 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에도 당선됐다.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이 짧은 시간 동안’, 동화집 ‘에밀레종의 슬픔’ ‘바다로 날아간 까치’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