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 새로 온 나팔병 녀석 말야. 그 자식 취침나팔 기가 막히게 잘 불어. 마을 민간인들 말이 자기들도 밤이면 그 소릴 듣는데, 자다 말고 오줌 싸겠다는 거야." 대대 나팔수의 나팔소리가 아름다운 것은 영외(營外)의 만삭 애인에게 사랑을 전하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애인이 애를 낳다 죽자 그의 멋진 나팔소리도 다시 들을 수 없게 된다. 이청준의 단편 '이상한 나팔수'엔 '아득하고 길고 잔잔하고 구성진' 취침나팔의 추억이 있다.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1953년)에서 사병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애꿎게 죽은 친구 프랭크 시내트라를 위해 진혼(鎭魂) 나팔을 분다. 가혹한 병영생활을 다룬 이 영화에서 잔상(殘像)을 짙게 남기는 명장면이다. '나팔소리 고요하게 밤하늘에 퍼지면/ 이등병의 편지 한 장 고이 접어 보내오…'. 김광석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에서도 나팔소리는 감상(感傷)을 길어올리는 상징이다.
▶반면 새벽 단잠을 들쑤시며 고달픈 하루를 여는 기상나팔은 징그럽도록 원망스러웠다. 나팔은 하기식과 점호를 알리고 집합·휴식·돌격·사격중지 같은 다양한 훈련신호를 표현해내며 병사들과 일과를 함께했다. 나팔병은 가장 먼저 일어나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들어야 하고 본래 임무에 얹힌 가욋일로 나팔을 불어야 했지만 지망자가 많았다. 몽고메리 클리프트 아니라도 왠지 멋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1990년대 들어 부대마다 방송시설을 갖추면서 나팔은 CD에 녹음된 나팔소리 방송에 밀려났다. 그래도 화랑부대만은 사단본부에서 나팔수를 교육시켜 중대에 두 명씩 배치하는 전통을 지켜왔다. 아무리 방송·통신시스템이 발달해도 야외훈련이 잦은 보병부대에선 나팔이 효과적이라고 믿어서다. 2년 전 강릉지역 수해 때 수천 병력이 전기도 없는 텐트에서 야영하면서 일사불란하게 복구작업을 펼 수 있었던 것도 나팔수들 덕분이었다고 한다.
▶화랑부대가 내년에 기계화부대로 바뀌면서 마지막 나팔수들도 사라지게 됐다. 장갑차마다 첨단 무전시설이 있는 데다 병력 운용상 나팔이 소용 없어진 탓이다. 군용 나팔은 사실 악기치고는 멍청하달 만큼 단순하다. 공기조절 밸브 '판(瓣)'도 없는 민짜여서 입바람 세기에 따라 도·미·솔밖에 못 낸다. 그래도 나팔은 정겹고 끔찍하고 나른하고 용기백배하던 병사들의 굴곡진 애환(哀歡)과 체취를 실어냈다. CD가 내는 기계음에 가슴 찡해질 병사가 있을까.
(오태진 논설위원 tjo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