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구(金容九·67) 한림대 한림과학원 특임교수와 전재성(全在晟·39)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는 전 교수가 1983년 서울대 외교학과에 입학함으로써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전 교수는 김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외교사에 관심을 갖게 됐고 김교수가 서울대 외교학과를 정년퇴임한 후 스승이 가르치던 국제관계사 담당 교수로 자리를 이었다.

김용구 교수는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학사·석사·박사를 받았고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33년간 교수로 재직한 국제정치학계의 원로. 국제정치학회 회장, 서울대 사회대 학장을 역임했고 2002년 학술원 회원으로 선임됐다.

‘소련 국제법 이론’ ‘세계외교사’ ‘루소와 국제정치’ ‘외교사란 무엇인가’ 등의 저술이 있고 현재 한말(韓末) 외교사 5부작을 집필 중이다.

전재성 교수는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학사·석사를 받고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박사를 받았다. 숙명여대 교수를 거쳐 2003년부터 서울대 외교학과에 재직하며 국제관계사·국제관계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 외교사의 특징과 21세기 한국 외교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김용구(왼쪽)·전재성 교수. 두 사람은 한국이 변방적 사고를 벗어나 거시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대외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br> <a href=mailto:yhhan@chosun.com><font color=#000000>/ 한영희기자</font><


전재성 =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미(美) 제국론, 문명충돌론, 세계화론 등 국제 정치에 대한 서구 학자들의 다양한 전망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서 우리 시각을 시급히 정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선생님께서는 한국외교사의 연구에서 비롯된 독자적인 시각으로 ‘세계관 충돌’의 외교사를 제시하고 계시지요?

김용구 = 세계관 충돌이라는 개념은 비교 문명권 이론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충돌은 어떤 물리적인 접촉만이 아니라 상이한 정신 구조의 만남 전체를 의미하며, 이들 사이의 오해·굴절·저항·선택 모두를 총칭합니다.

아시아 유교 질서와 서양 공법(公法) 질서 세계관의 충돌이야말로 19세기 한국 외교사를 규정한 핵심적인 특징입니다. 결국 세계관 충돌이란 시각은 세계외교사를 유럽의 세계 팽창사로 간주하여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는 ‘유럽 중심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입니다.

= 국적 없는 국제정치학은 없고, 국제정치학은 국제정치의 힘 관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선생님께서는 19세기 한국 외교 사고의 근저에 '오지(奧地) 사고'라는 근본적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신 바 있는데요.

='오지 사고'란 19세기 조선 주변에서 형성된 낮은 수준의 세계 인식 태도를 지칭하려고 제가 창안한 용어입니다. 한반도의 오지 사고는 1800년 정조(正祖)가 승하한 이후 형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특징은 첫째, 세계 인식의 타율성(他律性)으로 자신의 문화 수준 향상에 기초하여 세계 정치를 보지 못하고 다른 지역의 인식으로 안이하게 대신하고자 하는 사고 방식입니다. 둘째, 중심 문화 수용 일변도의 사고입니다.

세계 정치에는 중심과 주변이 존재합니다만 오지 사고는 다른 주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 특징입니다. 셋째, 본질 대 형식의 대립에 있어서, 오지 사고는 국제정치 구조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국제정치 현상 중 형식적인 측면에 치중합니다.

넷째, 책임 전가의 문제입니다. 오지 사고는 외부 문화 수용의 실패를 모두 중심 세력에 전가합니다. 오지 사고의 극복은 우리 학계가 지닌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로서, 문화 수준 향상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19세기는 외세의 침략, 내정의 혼란뿐 아니라, 보다 거시적인 새로운 세계관의 전파의 세기였다고 생각됩니다.

21세기에 한국은 다시 변화된 세계관의 흐름을 맞이할 것이고, 우리가 여전히 오지 사고에 머물러 있다면 변방의 운명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19세기만큼 절박감을 가지고 있는지 우려됩니다.

=한반도는 19세기·20세기·21세기, 3세기에 걸친 역사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지역입니다. 세기마다 근대국가의 창설, 냉전의 해결, 세계화 문제의 해결이라는 사명에 직면해왔고, 한반도는 이러한 역사적 문제들을 동시에 해결해야 합니다.

저는 19세기의 문제가 곧 21세기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한반도에 대한 19세기 열강들의 인식이 큰 흐름에서 아직 상존하고 있고, 우리의 대외 인식 수준 또한 19세기적이라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외교를 둘러싼 의견 대립은 민주주의 사회의 특징입니다. 다만 공적인 절차와 토론을 통한 대립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국제정치의 기본 문제나 핵심 사항에 대한 논쟁이어야지 정파적인 대립은 금물입니다.

우리는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고, 비본질적인 문제로 의견 대립이 심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세기 조선의 미국관이 '해국도지(海國圖志)' 등에 의해 감상적, 단편적으로 형성되어 미국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결여하는 문제점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1세기에 접어든 현재 우리가, 보다 총체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국제정치관과 한미관계의 전략을 가지고 있을까요? 한국외교의 최대의 화두들 중의 하나는 한미관계일 것입니다.

=미국은 9·11 사태 이후 다른 차원의 국가가 됐습니다. 역사적으로 존재해 온 '제국주의적 공화주의' 또는 '공화주의적 제국'의 뿌리가 완성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인민 주권론과 개인주의 사상에 입각한 세계 제국의 등장입니다.

제국이라는 용어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후 사용을 꺼려온 단어입니다. 제국주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특히 9·11 사태 이후 ‘미국은 제국이다’라는 말이 찬반 양쪽에서 모두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역사적으로 존재해 온 ‘미국적 예외주의’ 사상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예외주의’란 당초 유럽이 보유하지 못한 우월한 사상적 전통을 지칭했는데 9·11 사태 이후 미국적인 것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측면이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제 미국은 ‘필수불가결한 세력’입니다. 세계 어느 문제이건 미국의 관여나 협의 없이는 해결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미국의 국제 정치 방향을 논리적인 입장이 아니라 감정적인 측면에서 비판하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거나 오기에 불과합니다.

=근대에 편입된 이래 한국은 35년간의 외세 침탈, 35년간의 일제시대, 45년간의 냉전을 겪으면서 외교다운 외교를 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탈냉전기 한국 외교를 둘러싼 국민들의 분출되는 열정을 보면서 우리 모두는 외교의 방향 설정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한국에 정상적인 외교가 존재하는지 의문입니다. 굳이 있다면 투쟁적, 이념적 외교라는 현상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프랑스 혁명 이후나 소련 혁명 이후와 유사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외교 행위를 선악으로 구별하거나 이념을 먼저 설정하고 추진하는 것이 매우 유사합니다. 일시적인 현상이길 바랍니다. 민주사회에서 정권은 교체됩니다.

그러나 외교 노선은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국제정치에 있어서 적과 동지를 한번 도치시키면 그것을 회복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세계 외교사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국제정치는 생활세계와는 다른, 냉정한 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국제정치학자의 사명은 날이 갈수록 중대해지고, 국제정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나라의 운명과 직결될 것입니다. 국제정치학자들이 학문과 한국 외교의 발전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요.

=지식인으로서의 국제정치학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 '기술자로서의 지식인'은 강대국의 국제정치 이론을 충실히 전파하는 데 치중합니다.

둘째, ‘이념 전달자 또는 이념 창조자, 즉 이데올로그’인데, 이들은 특정 정당, 정치 집단의 명분을 선전합니다. 마지막으로‘철학자로서의 지식인’은 자신이 처한 국가나 사회의 역사적 발전 방향을 설정해 이에 대한 원칙을 제시할 수 있는 지식인입니다.

저는 후학들이 이런 지식인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정리=전재성 교수)







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

전재성=근대 한국에 있어 국제정치는 전파되었고, 국제정치학은 수입되었습니다. 21세기의 국제정치를 헤쳐 나가기 위해 우리의 국제관계사에 기반한 국제정치학이 긴요합니다. 선생님께서는 평생 한국 외교사 연구에 전념해오셨고, 최근 한국 외교사 5부작 중 두 번째 책인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출간하셨습니다. 현재 연구 동향과 목적을 말씀해주시지요.

김용구=요즘 세 가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한국 외교사 5부작을 완결하는 작업입니다. 5부작 중 두 번째 책인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끝내고 세 번째 책인 ‘거문도사건과 조선·러시아관계’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한국 외교사의 파행적인 세계화 과정을 추적하는 작업입니다.

두 번째 작업은 15년 전에 나온 세계 외교사를 완전히 개정, 보완하는 일입니다. 작년에 한림대학교 특임교수가 된 이후 제 책을 정독했습니다. 여러 가지 미비한 점을 발견하고 경악했습니다. 내용을 증보하고 참고 문헌의 보완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한국 외교사 5부작 중 이미 나온 책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입니다. 그 첫 번째 책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 중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관련 부분을 번역한 것이 ‘Five Years' Crisis’이고 그 속편으로 명치유신 이후 한·일관계를 번역한 ‘The Dissolution of the Kyorin Order’를 현재 인쇄 중입니다.

지난 1997년 ‘세계관 충돌의 국제정치학’을 발표하면서 10책에 달하는 비교국제관계사를 집필한다고 공언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외교사는 이 중 하나에 불과하게 구상했습니다. ‘춤추는 회의’가 첫 번째로 나왔습니다. 이 책이 나온 이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몇십 년이 걸리는 작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한국 외교사 문제가 아직 정리되어 있지 않아서 이 문제를 먼저 착수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외교사의 중요성은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선생님께서는 동·서양 외교사, 특히 19세기 한국 외교사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기고 계십니다. 언젠가 학회보에 외교사란 강대국의 외교의 산물이고, 조약이란 강대국의 인식의 표현이란 취지로 말씀을 남기신 적도 있는데, 외교사 연구를 평생하시면서 가지고 계신 목적이나 소회가 있으시다면 듣고 싶습니다.

김=한국 외교사의 기본 목적은 한반도의 역사적인 현주소를 밝혀내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현주소를 말입니다. 그런 정신적인 구조는 외교 문서 속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외교사는 외교 문서 속에 함축되어 있는 정신구조를 분석하는 학문 분과입니다. 열강의 한반도에 대한 인식 태도는 그들 문서 속에, 그리고 우리의 인식 구조는 우리의 문서 안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때에 정신구조, 세계관, 인식 태도란 대외문제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응을 말합니다. 그런 무의식적인 반응은 오래된 믿음이나 두려움의 산물입니다. 논리의 문제라기보다는 표현될 수 없는 어떤 강박관념의 반응입니다. 이런 정신구조는 수 백년 지속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 사회의 문화 수준에 따라 정신 구조의 부정적 측면을 단시일 안에 극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1815년 빈 회의 이후 영국에 대한 프랑스의 태도, 비스마르크의 통일에 대한 남부 독일지역의 태도 등이 그 사례입니다.

저는 우리의 인식 태도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고 그런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이 한국 외교사의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외교사 연구는 중요한 학문 분과인데도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잘 연구되어 있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여러 언어의 지식이 전제되기 때문에 기피하고 있습니다. 기초학문 부진의 한 현상입니다.

전=마침내 근대를 넘어서는 국제정치가 21세기를 주도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미제국론, 문명충돌론, 세계화론 등 서구학자들의 다양한 전망을 보면서 지식의 국제정치에서 우리의 시각을 시급히 정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선생님께서는 한국외교사의 연구에서 비롯된 독자적인 시각으로 ‘세계관 충돌’의 외교사를 제시하고 계시는데, 그 핵심 내용은 무엇입니까?

김=세계관 충돌이라는 개념은 비교문명권 이론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먼저 요즘 유행하는 ‘충돌’이란 용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충돌은 어떤 물리적인 접촉만이 아니라 상이한 정신구조의 만남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들 사이의 오해, 굴절, 저항, 선택 모두를 지칭합니다. 그런데 19세기 충돌은 근본적으로 폭력적인 만남이었는데 그 까닭은 유럽문명권의 본질이 폭력이었기 때문입니다. 폭력은 물리적인 강압을 포함해 자기 의사와 이익을 남에게 강요하는 정신적인 지배현상 모두를 지칭합니다.

역사적으로 여러 문명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유럽사회가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놀랍게도 19세기 이후입니다. 문명들이라는 복수의 명사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19년쯤입니다. 역사적으로 여러 문명권이 존재해 왔고 그 문명권에는 그에 고유한 정신구조, 근본 심벌, 초 스타일, 세계관이라고 부르는 사고방식이 존재합니다. 유럽문명권의 공법 질서와 유교문명권의 사대 질서가 충돌하기 시작한 것은 아편전쟁 이후입니다.

이런 세계관의 충돌이 19세기 한국 외교사에 나타난 핵심적인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1866년 프랑스라는 특이한 정치세력과 충돌합니다. 프랑스는 유럽문명의 특징과 더불어 프랑스적인 정신구조를 지닌 정치 집단입니다. 프랑스적이란 의미는 제3공화국의 성격을 말하는데 가톨릭 전파를 정치 명분을 갖고 있던 세력입니다. 제3공화국 프랑스에서는 가톨릭세력의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1866년 프랑스 해군의 노략질로 인해 우리는 세계를 정확히 볼 수 있는 여유를 상실합니다. 위정척사이론에 의한 저항적인 측면이 정면에 나옵니다.

다음은 1871년 미국의 침략입니다. ‘해국도지’에 의해 형성된 미국관에 일대 수정이 필요한데도 한번 형성된 미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는 그리 쉽게 변하질 않았습니다. 부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오히려 침략을 감행한 미국의 한반도 이미지입니다. 야만적이고 쓸모 없는 지역으로 인식한 이런 부정적인 인식은 오래 지속됩니다. 1882년 서양세력 중 처음으로 조선과 조약을 체결한 것은 이율배반적인 얘기 같습니다만 한반도에 대해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조약 체결 이후 1905년 우리가 외교권을 상실할 때까지 워싱턴 당국은 한반도는 관심 밖의 지역이었고, 국무부에는 한반도 전문가도 없었습니다. 관심을 가진 것은 이곳 서울에 와 있던 미국 외교관들이었습니다. 조선 위정자들은 워싱턴 당국의 정책과 서울 현지 외교관들의 개인적인 관심을 혼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명치유신을 거친 일본과 충돌합니다. 명치유신 이후 8년 동안의 위기가 이를 말해 줍니다. 일본은 청조의 등장 이후 사대 질서 밖에 존재한 정치 세력이었는데 명치유신 이후 서양 공법 질서에 입각해 조선과의 관계를 재수립하려고 했습니다. 8년의 위기를 거쳐 체결한 강화도조약은 이런 두 질서의 충돌 결과입니다. 이 조약의 해석은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등장한 특이한 집단은 실은 중국입니다. 1880년을 전후해 중국은 매우 다른 국가로 변합니다. 사대 질서의 종주국이 공법 질서의 식민 본국으로 변합니다. 주변 지역을 전통적인 속방에서 공법 질서의 속국으로 변질시키려고 합니다. 그 명분을 전통적인 사대 질서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현재 중국의 한반도 문제에 관한 역사 선전도 이런 해석의 아류에 불과합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 슬라브 세력이 가세합니다. 러시아는 세 가지의 전통을 가진 독특한 세력입니다. 하나는 서유럽에 대한 열등의식, 희랍 정교의 종주국으로서 세계 구원 의식 그리고 아시아에 대한 우월 의식이 그것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도스토예프스키는 철저한 아시아 천시주의자이며 제가 자주 인용하는 다닐레프스키(Nikolai Ya. Danilevsky)도 그렇습니다.

기본적으로 세계관 충돌이란 시각은 비교문명권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학부 시절부터 유교, 이슬람, 기독교 문명권에 관해 강의를 들었습니다. 1950년대 말에는 미국의 행태주의 국제정치 이론이 세계에 풍미하자 영국의 교수들은 ‘국제정치이론 영국위원회’를 결성해 비교국제사회 이론을 천착하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 말 헤이그 국제법 아카데미에서는 비교문명권의 명분 세계 분석에 주력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는 세계관 충돌은 기본적으로 서유럽 외교사 연구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세계 외교사를 유럽의 세계 팽창사로 간주해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는 ‘유럽 중심주의’에 입각한 그들 서술 체계에 대한 회의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저에게 여러 암시를 해준 것은 서유럽과 반대 입장에 있던 러시아의 극단주의에 속한 다닐레프스키의 ‘유럽과 러시아’란 방대한 책입니다. 이 책은 크리미아전쟁이라는 아무런 이유 없이 러시아를 침략한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울분에 찬 저술입니다. 논리의 비약이나 자연과학자의 공식적인 설명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유럽문명권의 본질에 대해서는 혜안에 찬 저술입니다.

전=국적 없는 국제정치학은 없고, 국제정치학은 국제정치의 힘 관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선생님께서는 19세기 한국 외교사고의 근저에 오지사고라는 근본적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신 바 있는데, 오지사고란 무엇이며, 어떠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김=19세기 주변 지역 중 주변 지역에서 형성된 저 수준의 세계 인식 태도를 지칭하려고 제가 창안한 용어입니다. ‘오지(hinterland)’란 용어는 히틀러의 어용 지정학자들이 쓰던 낱말이어서 거부감이 있을 수 있으나 19세기 이래 우리의 처지를 웅변적으로 나타낸다고 생각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남미 전문가인 미뇰로(Walter D. Mignolo)는 ‘변경사고(border thinking)'라고 이름지어 남미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오지 사고는 1800년 정조가 승하한 이후 형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그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세계 인식의 타율성입니다. 세계 정치에 대한 인식을 자신의 문화 수준의 향상에 입각해 보질 못하고 세계 다른 지역의 인식으로 안이하게 대신하고자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둘째, 중심 문화 수용의 일변도의 사고입니다. 세계 정치에는 중심과 주변이 존재합니다만 주변도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오지 사고는 다른 주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 특징입니다.

셋째, 본질 대 형식의 대립에 있어서 오지 사고는 국제정치 구조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국제정치현상 중 형식적인 측면에 치중합니다.

넷째, 책임 전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즉, 오지 사고는 외부 문화 수용의 실패를 모두 중심 세력에 전가합니다. 슈펭글러(Oswald Spengler)가 말하는 ‘가정(假晶pseudomorphosis)’의 현상이 만연된 지역의 사고방식입니다. 21세기의 현상을 19세기의 사고로 해석하는 경향이 오지 사고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오지 사고의 극복은 우리 학계가 지닌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극복은 문화 수준 향상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인데 특히 대외문제에 대한 인식 고양은 ‘창조(invention)'를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고 과거의 경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런 의미 부여는 세계 학계가 인정하고 수긍하는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의미 부여는 또 하나의 오지 사고일 뿐입니다.

우리는 실학, 특히 북학파의 위대한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전통을 다시 ‘창조’해야 합니다. 1788년 ‘동문휘고’라는 위대한 외교 문서집 편집의 전통을 다시 창조해야 합니다. OECD 국가 중 자신의 외교 문서집을 갖지 못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한 예일 것입니다. 오지 사고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집필을 계획대로 완성한다면 그 이후에는 크게 두 가지 일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는 유럽문명권, 사대 질서, 공산주의 세계, 이슬람세계에 관해 오랫동안 수집해온 자료들을 동원해 비교국제사회론 또는 비교국제관계사를 써볼까 합니다. 다른 하나는 한국 외교사 ‘사전’을 만들어 보려는 오래된 꿈을 이루었으면 합니다. 일본 외무성이 편찬한 ‘일본외교사사전’과 같은 사전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전=한국 국제정치학계의 어른으로서 크게는 한국의 국제정치학, 작게는 외교사 연구 분야에 있어 한국 국제정치학의 가장 큰 문제와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한 서구의 국제정치학과 비교하여 이를 어떻게 수용하고 소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김=저는 오늘날 한국 국제정치학계는 일대 전환기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대외 인식에 관한 명분 세계는 크게 세 번의 전환기가 있었다고 봅니다. 첫째는 실학, 북학파의 전통을 이어 받은 개화파 인사들의 노력으로 국권을 1910년까지 그나마 유지한 시기입니다. 다음은 36년 일제시기로 나라가 없어진 것이 세계 학계에서 한국학의 불모지로 만든 기본 원인입니다.

마지막으로 1945년 이후의 시기인데 크게 보아 성공하지 못한 시기라고 판단합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발전이 있었으나 세계의 여러 국가들과의 비교적인 의미에서는 실패였다고 진단합니다.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만 아마 가장 두드러진 예는 냉전시대 구소련에 관한 인식을 들면 충분할 것입니다. 상세한 예를 들자면 소련 군사비 계산문제, 태평양 함대 전력에 대한 무지, 러시아 자체에 대한 무지, 소련사와 러시아사에 대한 무지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런 단계를 속히 탈피해야 합니다.

국제정치학자들이 지닌 임무는 그가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떤 국제정치적인 진로를 밟아야 하는 가하는 원칙과 경륜을 제시하는 일입니다. 고도의 정책 연구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도의 정책 제시는 철저한 기초 이론에 입각해야 합니다. 외국 기초 이론의 결론만을 차용해 여기에 의존한 정책 연구가 얼마나 위험하고 우리 사회의 진로와 역방향에 있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은 위의 구소련 정책 연구의 예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전=선생님께서는 현실 외교에 관해서는 많은 글을 쓰시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중대한 전환기에 처해 있는 한국 외교와 관련하여 의견을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올 초 한 신문에 기고하신 글에서 한국이 오지 사고를 극복하고 국제정치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점, 자주와 동맹이 보완적이라는 점, 미국이 제국이라 불릴 만큼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으며 따라서 한국도 감상적이 아닌 정확하고 진취적 인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신 적이 있습니다. 19세기는 외세의 침략, 내정의 혼란뿐 아니라 좀더 거시적인 새로운 세계관의 전파 세기였다고 생각됩니다. 21세기에 한국은 다시 변화된 세계관의 흐름을 맞이할 것이고, 우리가 여전히 오지사고에 머물러 있다면 변방의 운명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19세기만큼 절박감을 가지고 있는지 우려됩니다. 선생님께서는 외교사가로서 또한 국제정치학자로서 21세기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21세기를 대하는 한국인들의 태도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김=한반도는 19·20·21세기, 3세기에 걸친 역사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유일한 지역입니다. 19세기의 사명은 근대국가의 창설이고, 20세기의 그것은 냉전의 해결이며, 21세기는 세계화 문제의 해결입니다. 이런 역사적 문제들을 동시에 해결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19세기가 21세기에 어떤 시사 또는 비교를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저는 19세기는 곧 21세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19세기의 국제정치 현황이 오늘날과 비슷하다고 해 역사를 배운다는 명제를 반대합니다. 비슷하다는 것은 학문적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열강들의 한반도 인식이 큰 흐름에서 아직 상존하고 우리의 대외 인식 수준이 19세기적이라는 데에서 역사를 배워야 한다고 봅니다. 과거가 현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를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19세기는 곧 21세기입니다.

전=다음은 한국의 여러 주체들의 외교 인식에 관해 여쭙겠습니다. 정부와 시민사회 등 한국의 모든 주체들이 외교에 관해 어느 시대보다도 많은 의견의 편차, 대립을 보이고 있습니다. 흔히 보수와 진보, 자주 중시와 동맹 중시 등으로 표현되는 한국 내 외교관의 대립에 관해 어떻게 보십니까?

김=의견 대립은 민주주의사회의 특징입니다. 다만 공적인 절차와 토론을 통한 대립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국제정치의 기본 문제나 핵심 사항에 대한 논쟁이어야지 정파적 대립은 금물입니다.

본질을 떠난, 형식적인 그리고 집단 이익 사이의 극심한 대립은 세계 중심 지역의 국제정치 구조가 격변할 때 세계의 주변 지역 중 오지 사고의 지역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1991년 구소련 해체 이후 이른바 탈냉전시대는 냉전시대의 사고로는 도저히 대처할 수 없는 현상들의 시대입니다. 무엇보다 행위자들이 중세 질서, 근대 행위자, 유럽연합과 같은 현대 행위자, 미국과 같은 초현대적인 행위자들이 공존하고 있어서 이런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는 비본질적인 문제로 의견 대립이 심화되고 있을 뿐입니다.

전=선생님께서는 19세기 조선의 미국관이 ‘해국도지’ 등에 의해 감상적, 단편적으로 형성되어 미국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결여하는 문제점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1세기에 접어든 현재 우리가 보다 총체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국제정치관과 한·미관계의 전략을 가지고 있을까요? 한국 외교의 최대 화두들 중의 하나는 한·미관계일 것입니다. 21세기의 미국과 한·미관계의 장래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김=미국은 9·11사태 이후 다른 차원의 국가가 됐습니다. 역사적으로 존재해온 ‘제국주의적 공화주의(Imperial Republic)’(Raymond Aron) 또는 ‘공화주의적 제국(Republican Empire)'(Bradford Perkins)의 뿌리가 완성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민 주권론과 개인주의 사상에 입각한 세계 제국의 등장입니다.

제국이라는 용어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이후 사용을 꺼린 단어입니다. 제국주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특히 9·11사태 이후 ‘미국은 제국이다’라는 말이 찬반 양쪽에서 모두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역사적으로 존재해온 ‘미국적 예외주의’ 사상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란 당초 유럽이 보유하지 못한 우월한 사상적 전통을 가리키었는데 9·11사태 이후에는 미국적인 것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측면이 부상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방 조치 또는 예방 전쟁론에 입각해 유엔 헌장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제법이 미국 국내법과 어떤 측면에서 구별되는지 모호하게 되었는데 현재 쿠바 관타나모에 억류된 아프가니스탄 포로 대우의 문제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미국은 ‘필요 불가결한 세력(indispensible Power)’입니다. 세계 어느 문제이고 간에 미국의 관여나 협의 없이는 해결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미국이 현재 세계 제국의 역할 수행에 문제가 있지만 세계 제국으로서의 미국의 존재는 국제정치 현실의 한 여건입니다.

우리로서는 여러 시나리오를 연구하고 이에 대한 우리의 진로를 모색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우리가 미국의 국제정치 방향을 논리적인 입장이 아니라 감정적인 측면에서 시정을 요구하려고 선언하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거나 오기에 불과합니다. 미국의 방향 설정은 미국 사람들의 몫입니다.

전=조선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중국과의 오랜 관계를 청산한 이래 1992년 한·중 수교와 더불어 다시 한·중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일부 논자들은 미국과의 수평적 관계를 주장하면서 중국에의 접근을 주장하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고, 요즈음에는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시도가 노골화되면서 중국 비판 정서가 자라나고 있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중국을 어떻게 파악하고 어떠한 외교관계를 맺어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김=저는 중국 전문가가 아닙니다. 고구려 역사문제나 독도문제를 보면서 저는 1951년 프랑스와 독일 사학자들의 선언을 생각합니다. 두 나라는 정신적인 적국이었는데도 양국의 지도적인 역사학자들이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 문제를 앞장서서 해결을 모색한 선언이었습니다. 고구려 역사나 독도문제와 같은 명분 세계에 속하는 문제는 누구보다 먼저 지식인들이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일 교과서위원회 문제도 일본은 그들의 위원회가 활동하는데 우리는 아직 구성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문제는 한·일·중 3국의 학자들이 정기적인 회의를 거쳐 토론을 먼저 해야지 정권 담당자들이 전면에 나서는 것은 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명분 해석 문제로 현실적인 외교관계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좋은 방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전=근대에 편입된 이래 한국은 35년간의 외세 침탈, 35년간의 일제시대, 45년간의 냉전을 겪으면서 외교다운 외교를 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탈냉전기 한국 외교를 둘러싼 국민들의 분출되는 열정을 보면서 우리 모두는 외교의 방향 설정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정부의 외교전략에 대해 어떠한 말씀을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김=정상적인 외교라는 현상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굳이 있다면 투쟁적, 이념적 외교라는 현상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프랑스혁명 이후나 소련혁명 이후의 외교 현상과 유사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외교 행위를 선악으로 구별하거나 추진하려는 이념을 먼저 설정하는 것이 매우 유사합니다. 일시적인 현상이길 바랍니다.

민주사회에서는 정권은 교체됩니다. 그러나 외교노선은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국제정치에 있어서 적과 동지를 한번 도치시키면 그것을 회복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세계 외교사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한국 외교의 개선 방향에 관해서는 실로 많은 의견들이 개진되고 있습니다. 최고 결정자의 역할, 외교 관련 각 부처들의 협조문제, 외교부의 위상과 조직 등 앞으로 한국의 외교를 발전시키기 위해 어떠한 일들이 필요한지, 큰 방향을 제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김=후진국의 특징은 제도와 현실이 괴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세계 역사에서 볼 때 제정 러시아나 오토만 터키가 제도와 현실 괴리가 현격한 두드러진 예입니다.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합니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 위험이 고조될 당시 1902~03년 사이 뤼순(旅順)에서는 만주에 있던 고위 당국자들 사이에 회의가 빈번히 열렸습니다. 만주군 사령관 쿠로파트킨(Alexei N. Kuropatkin) 장군이 회의장에 들어서자 현직 장교가 베조브라조프(Aleksandr M. Bezobrazov) 일당의 압록강 벌목회사의 직원을 겸한 것을 목격하고 그 자리에서 계급장을 떼고 퇴역시킵니다. 그 장교는 아무 거림낌없이 물러납니다. 현직 장교뿐 아닙니다. 외교관, 영사들도 이 회사의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압록강 벌목회사는 황제 측근들의 주식회사였습니다. 외교를 제도화해야 합니다. 권력은 한시적이지만 외교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전=국제정치는 생활세계와는 다른 냉정한 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국제정치학자의 사명은 날이 갈수록 중대해지고, 국제정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나라의 운명과 직결될 것입니다. 앞으로 후학들이 학문과 한국 외교의 발전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저는 후학들이 ‘철학자로서의 지식인’이 되길 바랍니다. 이 점은 제가 가장 간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식인은 활자나 기호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파하여 그 사회의 문화 향상에 영향을 주는 사회 계층을 지칭합니다. 교수, 언론인, 종교인이 대표적인 계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지금 국제정치학자들을 대상으로 말씀드립니다. 지식인은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기술자(technician)로서의 지식인’입니다. 강대국 국제정치 이론을 충실히 전파하는 집단인데 이들의 역할은 긍정과 부정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강대국 이론을 전달하는 면에서는 긍정적일 수 있으나 전달 자체가 자기 해석이 결부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전달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문화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무의식적으로 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둘째, ‘이념 전달자 또는 이념 창조자(ideologue)로서의 지식인’입니다. 특정 정당, 정치 집단의 명분을 선전하는 집단인데 그들이 지탱하려는 집단의 성격에 따라 역할이 상이하고 이른바 선진국과 후진국에서의 그들 역할도 상이합니다. 1960년대 이후 너무 많은 교수들이 이 유형에 해당하는 것이 한국 국제정치학 발전에 과연 도움이 되는 일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셋째, ‘철학자(philosopher)로서의 지식인’입니다. 자신이 처한 국가나 사회의 역사적 발전 방향을 설정해 이에 대한 원칙을 제시할 수 있는 지식인입니다. 저는 후학들이 이런 지식인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는 하는 문제는 철학자로서의 지식인에게는 자연히 뒤따라 발생하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정리=전재성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