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아직도 어둑한 늦겨울의 새벽, 밤새 얼어붙은 공기가 코끝에 맵게 달라붙는데 삐이걱, 경복궁 동쪽 대문인 건춘문(建春門)의 우람한 문이 조금 열리더니 두 대의 궁궐 가마가 살며시 빠져나왔다. 무뚝뚝한 얼굴의 궁궐 수비병 손으로 커다란 대문이 도로 닫힌 뒤 경복궁은 다시 고요한 어둠 속에 잠겨들었고, 수행원이 전혀 딸리지 않은 단촐한 두 대의 가마를 멘 가마꾼들은 일체 소리를 죽인 채 도성의 남쪽을 향해 걸음을 재게 옮겼다.

조선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기이한 사건 중 하나였던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첫 발걸음은 이렇듯 은밀했다. 그러나 사건의 파장은 엄청난 굉음으로 세상을 갈랐다. 우뢰가 하늘을 가르는 듯 했다 할까. 벼락이 대지를 후려치는 듯 했다 할까. 조선의 건양(建陽) 원년(1896년) 2월 11일 새벽에 조선의 통치자인 대군주(고종)와 그의 후계자인 왕태자(후일의 순종)가 두 대의 가마에 앉아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서 황토재(지금의 광화문 네거리)를 빠르게 지나 정동에 있는 한낱 외국 공사관에 불과한 아관(俄館·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가버린 비밀 행차는 즉각 극동 각국의 권력 판도와 정세를 일시에 바꾸어버린 대사건이 되었다.

고종 일행이 빠져나간 궁문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주장이 달라서 ‘신무문(북문) 설’ ‘영추문(서문) 설’ 등이 있는데, 여기서는 그 사건을 가장 상세하게 기록한 구한말의 우국지사 정교(鄭喬, 1856~1926)의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 기록된 ‘건춘문(동문) 설’을 따른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 일행이 건물 밖을 내려다보고 있다. 2층 중앙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 중 오른쪽이 고종이고, 왼쪽은 왕태자(뒤의 순종)이다. 좌우에 서 있는 사람들은 각 부 대신이다.

▶▶▶

그 참혹한 을미사변까지 일으키면서 무도하게 조선 궁중을 장악한 일본은 조선을 자국의 세력권 안에 확고하게 편입시킨 것으로 계산했다. 절대군주 체제에서는 군주를 확보하는 것이 곧 그 나라 전체를 확보한 것이 되기에, 조선의 대군주(고종)를 궁중에 연금하고 외부로 탈출하지 못하도록 삼엄하게 감시했다. 그 감시체제가 매우 효과적으로 가동하고 있었기에 임금이 처음으로 시도했던 왕궁 탈출용 군사작전인 ‘춘생문 사건’이 유혈의 비극으로 끝났다.

그러나 고종은 포기하지 않았다. 춘생문 사건으로부터 불과 두 달여, 그 사건으로 처형된 이들의 피냄새가 미처 가시기도 전인 새해 2월 11일 새벽에 다시 탈출 작전을 결행한 것이 아관파천이었다. 당시 고종으로서는 일본에 머리 숙여 아부하고 철저하게 굴종하면 무사히 옥좌를 지키면서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사안일한 굴종 대신 위험천만한 저항을 택했다. 그래서 단 한 명의 호위병도 딸리지 않는 궁녀의 가마에 몸을 싣고 궁궐을 탈출한 것이다. 실패할 경우 모든 것을 잃는 파국을 각오해야만 감행할 수 있는 비상 작전이었다.

그렇기에 아관파천은 단순히 외형적인 면만 보자면 조선의 군주가 자신의 커다란 궁궐을 버리고 한낱 조그만 외국 공사관 담장 안으로 피신한 괴이하고 구차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 본질을 보면 외세에 시달리던 조선의 군주가 자국이 당면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정국 운용의 주도권을 쥐고 ‘오랑캐(러시아)로서 오랑캐(일본)를 제압하는(以夷制夷)’ 전술을 선택한 사건이었다. 당시 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군 병력으로 러시아 공사관을 습격하여 모두 도륙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지만 그것은 즉각 러시아와 일본의 전면전이 발발함을 뜻하는 것이기에, 일본으로서는 일절 손을 댈 수 없다는 점을 냉철하게 계산한 전술이었다.

아관파천은 여러 차원에 걸친 특이한 영향과 파문을 일으켰다. 국제관계로 보자면 당대의 열강들의 권력 구도와 정세에 격변을 일으킴과 동시에 뒷날 일어난 러일전쟁의 실마리가 되었고, 국내 정계로 보자면 친일파를 모두 거세하고 친러파와 친미파가 권력을 잡게 되어 권력 판도가 일시에 바뀌었다.

아관파천이 일어난 후 일본군은 러시아공사관 문 앞에 대포까지 끌고 와서 고종의 환궁을 요구했다.

▶▶▶

이 사건은 또한 많은 인물들의 생사와 영화를 뒤바꾸어 놓았다. 조선조 말의 대인물로서 난국에 처한 국사(國事)에 대한 충정 때문에 불가피하게 친일 내각의 수장 노릇을 했던 총리대신 김홍집과 탁지부대신 어윤중이 난민에게 처참하게 참살되고 유길준 등은 망명하였고, 춘생문 사건 연루자로 도피중이던 이범진과 이완용 등은 일시에 복권하여 권력을 잡았다. 춘생문 사건 때 실제로 고종의 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을 보호하려고 “내가 밀지를 위조하여 사건을 일으켰다”고 거짓 자백하고 처형당한 임최수와 이도철에게는 즉각 복작(復爵)과 추증(追贈)의 은사와 함께 ‘충신’의 칭호가 내려졌다.

아관파천으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일방적 우위 시대는 끝나고 열강의 각축 시대가 전개되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임금이 내린 새로운 칙령 중에는 단발령에 관한 것도 있었다. “강제로 시행하지 말고 각자 편한 대로 하게 하라[從便爲之]”는 것이었다. 일본 세력의 급격한 퇴축은 을미의병의 성격과 양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다음 회는 ‘열강의 이권 침탈과 경제구국운동’ 입니다.

(소설가 송우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