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공부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토플을 공부하는 아이들은 ‘손익분기점’ 뜻도 모른 채 ‘break even point(손익분기점)’란 단어를 기계적으로 외웁니다. 또 하루 4시간동안 대학교재로 공부하다 보면 다들 지쳐서 널브러지죠. 심지어 수업 도중에 토하는 아이도 있었어요.” (서울 강남 A어학원 전직 영어강사 한모씨)

학부모들의 욕심에 의한 과도한 토익ㆍ토플 공부로 정신적ㆍ육체적 고통을 겪는 초ㆍ중등생들이 많다. 성인 대상 영어평가시험인 토익ㆍ토플 점수는 특목고 특별전형시 응시자격으로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많은 학부모들은 어린 자녀들에게 토익ㆍ토플 공부를 시키고 있다.

지난해 토익 최연소 응시자는 불과 10살 난 초등학생이었다. 초ㆍ중급자용인 ‘토익 브릿지(Toeic Bridge)’의 지난해 응시자중 92.45%가 초ㆍ중학생이었다. ‘토익 브릿지’는 도입 3년만에 응시자가 8배나 급증하기도 했다. 초등학생 대상 영어자격증 시험인 ‘Pelt(Primary English Level Test) 초등영어’도 지난해 25~26만명이 응시했다.

하지만 아이들중 상당수는 원하지 않는 영어 공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개인교습 경력 10년차인 한 여성은 “부모가 억지로 시키는 공부가 싫어서 수업 도중 화장실에 수시로 드나드는 아이, 선생님이 옆에서 수업을 하는데도 그림만 그리고 말 한마디 안 하는 아이도 많다”고 밝혔다. 이 여성은 또 “심지어 수업에 참가하기 싫어 선생님이 때렸다고 엄마한테 거짓말 하는 아이도 있을 정도”라고도 했다.

◆ “시키니까 한다” “좋은 학교 가려면 필수”

토익ㆍ토플 시험을 준비하는 상당수 학생들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거나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라고 말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모 중학교 1학년 김모군은 “엄마가 시켜서 초등학교 때 토플 학원에 다녔다”면서 “관심이 없어서 점수가 안 좋아도 기분 나쁘지 않았으나 힘들고 지겨웠다”고 했다. 김군은 그러면서 “내 아들한테는 그렇게 안 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시내 대형서점에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 ‘주니어를 위한 토익-토플’ 서가. 50여종이 넘는 교재들 사이에서 7살 여자아이가 ‘토익 브릿지’책을 보고 있다.

춘천 모 중학교 3학년 한모양은 외국어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토익을 공부하고 있다. 한양은 “일단 외고 가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거고, 나중에 회사 들어갈 때도 토익은 기본이니까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같은 학교 김모양도 “토익을 공부하고 있지만 영어 실력엔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된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의문사로 물어볼 때 yes나 no로 답하는 건 무조건 틀린 것이다, 뭐 이런 식으로 ‘찍는 요령’만 가르쳐줘요. 학원 마치고 밤 11시쯤 집에 오는데 이런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 가르치는 강사도, 시키는 부모도 힘들다

학원 강사들 일부는 초ㆍ중학생들이 토익ㆍ토플을 배우는 것에 대해 “너무 빠르다”며 부정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현직 영어 강사인 서모씨는 “지난해 여름방학 때 초ㆍ중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는데 대부분 ‘끌려온’ 아이들이었다”며 “아이들은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아침 8시까지 나왔다”고 했다. 그는 “그런데도 부모들은 강사들이 공부를 더 많이 시켜주길 원했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 학부모들은 "안쓰럽지만 아무래도 일찍 시키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천안에 사는 서모씨는 9살인 아들이 7살 되던 해에 '토익 브릿지' 시험을 보게 했다. 서씨는 "당시 아들이 다니던 영어유치원의 엄마들 모두가 자녀들을 시험 보게 했다"며 "내 아이도 덩달아 시켰다"고 말했다. 서씨는 또 "지난 6월 아들이 'Pelt'를 보러 갔는데 천안의 모든 어린이 영어학원에서 단체로 시험을 보러 온 것 같았다"고 했다.

한 특목고 대비 인터넷 사이트.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교 저학년을 겨냥한 토익 등의 강의가 단계별로 개설되어 있다.

초등학생 딸을 둔 소아과 전문의 이모씨는 “남들이 하는대로 해야 마음이 편한데, ‘영어공부 스트레스’ 때문에 병원에 오는 어린이 환자들을 보면서 내 딸아이에게는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하겠더라”고 했다. 이씨는 “딸아이는 원래 영어학원에 나갔는데 현재는 더 이상 나가지 않고있다”며 “아이가 원치 않아 강요하진 않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다”고 했다.

◆ “시험을 위한 영어공부는 무의미”

현재 전교생을 대상으로 ‘Pelt’ 시험을 치르고 있는 서울 한양대부속초등학교 송호기 영어부장은 “학생들 실력을 평가할 수 있는 객관성과 신뢰성을 가진 영어시험은 필요악”이라고 말했다. 송 교사는 “문제는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는 것”이라며 “시험이 목적이 된다면 점수는 오를진 모르지만 진정한 영어 공부의 의미는 없다”고 지적했다.

서울교대 영어교육과 이완기 교수도 “아이의 발달 단계와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맹목적으로 영어시험에 응시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며 “높은 점수를 받아두는 것이 나중에 좋다는 말만 좇아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