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의병’은 1896년 1~2월 전국 각지에서 봉기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충청도 제천의 저명한 유학자 유인석(柳麟錫)이 제자 서상열·이필희 등과 함께 일으킨 ‘호좌창의진(湖左倡義陣)’이었다. 의병장 유인석은 “나라의 모든 관리들은 친일(親日) 행위를 중지하고 의병 항쟁을 후원하여 원수를 갚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격문을 냈다. 유인석 부대는 관군·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충청도 관찰사·단양군수·청풍군수를 처단하는 등 큰 활약을 보였다.

조선시대 말기에 외세 배격을 내세우며 봉기한 의병의 모습. 당시 의병의 기개를 잘 보여주는 이 사진은 1907년 영국 신문 특파원으로 한국에 온 매켄지가 찍은 것이다.

강원도 춘천의 거유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이소응이 거병하여 춘천부를 점거했으며, 강릉에서 민용호가 유생과 포수(砲手)를 합쳐 ‘영동구군창의진(嶺東九郡倡義陣)’을 편성했다. 경기도에서는 이천·여주에서 의병이 일어나 남한산성에 집결했다. 경상도는 곽종석(郭鐘錫)·권세연 등이 이끄는 의병이 한때 안동을 점령했으며, 허위(許蔿) 부대는 금릉을 거쳐 대구에 육박했다. 전라도는 나주의 기우만이 각지의 의병을 광주로 집결시켜 호남창의군을 편성했다.

을미의병들은 기개는 높았지만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하고 장비도 빈약했기 때문에 오래 지속하기 어려웠다. 의기는 높았으나 개혁과 개화라는 당시의 시대적 요구를 읽지 못하고 전통 질서를 지키려했던 탓이다. 그해 8월까지 대부분의 의병은 해산했고 유인석 부대와 민용호 부대는 재기를 다짐하여 평안도와 함경도를 거쳐 만주로 들어가 을사조약 이후까지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