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서울 논현동의 한 음식점에서 프로기사 박영훈 9단(19)의 제17회 후지쓰배 우승 기념 축하파티가 열렸다. 박 9단의 아버지 박광호(51)씨가 소속된 고려대학교 기호회가 마련한 이날 자리에 부모님과 함께 나타난 박 9단은 검은색 티와 면바지 차림의 여느 10대와 같은 평범한 모습이었다.
박9단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기호회 회원들은 “솜씨 좀 보자”며 바둑판을 가져나왔고 이내 대국이 펼쳐졌다. 자신이 놓는 한 수 한 수에 온 시선이 쏠리자 박 9단은 쑥스러운지 계속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박9단은 지난달 5일 일본 도쿄(東京) 일본기원에서 열린 제17회 후지쓰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최단기간, 최연소 9단 승단의 기록을 세웠다. 입단 만 4년 7개월만에 9단 승단이라는 가장 빠른 기록과, 종전 이세돌 9단의 20살 9단 승단 기록을 1년 앞당긴 것이다. 후지쓰배는 세계4대 메이저 대회로 꼽힌다.
박9단은 참석자들에게 “대회 팜플릿에는 5단으로 돼있었으나 일본가기 이틀전에 그간의 기록을 바탕으로 1단 승단했다. 그리고 세계대회 우승후 3단 더 승단해 9단이 됐다”며 “짧은 시간에 4단이나 승단돼 아직 실감이 안난다”고 말했다.
박 9단에 대해 일본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99년부터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1400만부 이상 팔린 바둑 만화 ‘고스트 바둑왕’에는 박 9단이 등장한다. 만화의 주인공 히카루의 강력한 라이벌인 한국인 기사 ‘고영하’가 바로 그다. 만화의 작가 홋타 유미(Hotta Yumi)는 직접 한국을 찾아 박 9단을 만났다. 박 9단은 기자와 만나 “만화의 모델이 되어달라며 3년전쯤 집으로 찾아왔다”며 “바둑 공부하는 모습이랑 내가 생활하는 모습을 찍어갔다”고 말했다. 박9단은 “고영하가 사는 집을 만화책에서 봤는데 우리집이랑 똑같아서 신기했다”며 “다만 만화 속 고영하는 거만하고 건방지게 나오는데 나와는 좀 다른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박9단은 어린시절 부터 바둑과 함께 자랐다. 박9단의 어머니 박은규(50)씨는 “영훈이 아빠가 바둑을 좋아해서 집안에 바둑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며 “태교로 바둑 두는 소리를 들려줬으니 그 소리가 친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영향 때문인지 박9단은 어린시절 부터 바둑알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집안 분위기 때문인지 “바둑이 일상이고 친구였다”는 박9단은 6살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
바둑계의 ‘어린 왕자’로 혜성처럼 등장해 지금은 ‘어린 황제’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박9단이지만 그의 바둑인생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프로 입단시험에서 4년간 8번이나 떨어졌던 것이다. 박9단은 “처음 2년간 4번은 경험삼아 본 것이라 담담했지만 입단이 목표였던 나머지 2년간의 실패는 정말 힘들었다”며 “하지만 바둑 이외의 것은 생각해본적이 없었던 지라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안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바둑에 대한 애정 덕분인지 박 9단은 중학교 2학년때인 1999년 입단에 성공했다.
박 9단은 작년 12월 처음으로 세계대회 결승에 오른 제8회 삼성화재배에서 아쉽게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 대회를 통해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게 됐다”며 “자만하던 나에게 일침을 가한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박9단은 “실력이 쌓일수록 바둑은 더 재밌어진다”며 “돌 하나 하나가 일으키는 변화를 생각하다보면 시간가는줄 모른다”고 말했다. “10년 넘게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창호 9단처럼 되는 것이 최종 목표”라는 박 9단은 “이번 우승은 시작일 뿐”이라고 다부지게 말했다.